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바보 오빠’가 살았다.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은 그를 비하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의 바보같이 착한 심성 때문이었다. 더벅머리에 덩치 큰 소년은 골목길에서 허리춤에 오는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좋아했다. 집에 있던 귀한 물건들을 곧잘 나눠주었으며 공을 피해 도망가는 날쌘 아이들을 대신해서 맞아주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일제히 일터에 나가시면 골목 끝에서 아이들의 귀갓길 지키던 푸근한 사람이었다. 해질녘 늘어진 그의 바지 고무줄만큼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바보 오빠’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동네사람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부모님으로부터 과거 교통사고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 ‘바보 오빠’가 바보로 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한 골목 안에서 각양각색 주택을 짓고 살던 과거 그 시절에는 서로의 속사정과 밥숟가락 개수까지 속속들이 잘 알았기에 상관없었다. 아이들에게 ‘바보 오빠’는 그저 무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도시개발로 주택가에 쳐진 거미줄을 닮은 전선과 전봇대가 사라졌다. 뿌리 뽑힌 나무와 집들이 사라지자 언덕은 곧 평지가 되었다. 누워있던 도시가 일어서 수직화되고 우리의 주거문화는 2천에서 4천 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아파트에 살면서 집의 가치는 점차 물가상승률에 민감한 투자 대상이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브랜드와 동호수가 다를 뿐 똑같은 편리함을 누릴 수 있었다. 수납정리이사의 편리함이 더해져 원하는 곳 어디든 살아볼 수 있는 이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신도시로 유입되는 이방인들이 많아졌다. 우리 동네 사람이 누군지 다 알 수 없을 만큼 아파트에는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과 공존해 살게 되었다. 얼마 전 경찰서에서 성범죄자가 근처 아파트로 전입신고를 했다는 안내문자를 받았다. 전송된 사진 속 범죄자는 번지르한 외모로 아이들에게 경계심을 일으키기보단 호감상에 가까웠다. 하루에도 무심코 스치게 되는 수많은 이방인들 중에서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어르신들에게 궁금한 사람에 관해 물으면 알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낯선 사람들을 직접 판단을 해야 한다. 대화를 나눠보거나 혹은 인상이나 태도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을 더해서 인지를 한다. 헌데 자신이 인식하는 주관적 인지와 타자가 인식하는 객관적 인지 사이에는 ‘틈’이 존재한다. 인간은 비정형 3차원 입체와도 같아서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면을 보고 판단을 한다. 이로 인해 실제사람 보다 더 부풀려 보이게 만드는 후광효과 같은 인지부조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해석의 세계에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해석이 필요하다. 해석하는 일에는 각자 개인이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들이 더해진다. 때문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판단하는 대상이 ‘사실’이나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해석은 더욱 어려워진다. 사람마다 가진 사회적 감수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떠나 직장생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지만 한 사람을 다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서툴기 마련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사계절을 지내보라는 말이 있다. 빠르고 바쁜 사회의 속도로 온전히 사람을 관찰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는 MBTI가 등장하며 열광하게 만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신속히 판단할 수 있는 발명품으로 이제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범주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MBTI로는 다 설명될 수 없다.
순간적인 선택들이 쌓이고 모여 한 사람의 고유성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거꾸로 받아들이게 되면 위험해진다. 사람의 고유성은 순간적인 선택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순간적 의도나 감정 혹은 욕구 같은 것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뀌거나 해갈되면 없어지거나 대체되기도 한다. 사람의 고유성을 알 수 있는 신념이나 특성 혹은 통찰력은 대체로 관찰하기 어렵다. 때문에 타인을 향한 섬세하지 못한 이해는 섣부른 오해를 부른다. 오해에는 과거 자신의 경험이나 고정관념이 작용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살아오며 학습된 선입견이나 문화적으로 발달해 온 집단 착각이 영향을 준다. 이러한 잡음들 속에서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김유 작가의 <사자마트>라는 그림책이 있다. 어느 날 마트에 들어온 아주머니는 주인 사자씨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두 손을 들고 도망 나간다. 물건을 정리하던 사자씨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숨이 차서 목소리는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의 첫인상을 지배했던 ‘낙인효과’는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오해와 편견은 발 없는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아무리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쓸고 닦아도 사자아저씨의 가게에는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동네에 정전이 된다. 캄캄한 암흑 속에 촛불을 켜둔 사자마트로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들었다. 그동안 사자아저씨의 외모로 판단하던 시각적 자극들이 암흑 속에서 쓸모를 다하자 사람들은 부드러운 아저씨의 음성과 태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사람들은 매일 길고양들의 밥그릇을 살펴주던 아저씨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고 화해의 손길을 건네 온다.
<미국의 목가>를 쓴 작가 필립로스는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본 뒤에 또 ‘오해하는 일의 연속’이라고 본다. 그는 이 슬프지만 아이러니 한 세상과 화해하며 살아가는 일 또한 인생이라고 본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조차도 어려워 잦은 오해를 하기도 한다. 하물며 타인을 오해하는 일은 오죽할까. 적어도 <사자마트>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다지 많은 정보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보의 범람은 되려 또 다른 선입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건 상대방을 향한 ‘관심’과 ‘수용’일지 모른다. 적인지 아군인지를 따지기 전에 그동안 우리가 서로를 지켜왔던 인간성에 기대를 걸어봐야 한다. 인류 전체에 대한 기본적인 낙관과 사랑의 비결은 겸손함에서 찾을 수 있다. ‘행복’이 보이지 않는 네잎크로버를 찾는 ‘발견의 일’이라면 인류와 이웃에 대한 ‘경외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해를 차별 없이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 때로는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