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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Jan 13. 2017

귀여운 좀도둑

개인전 준비로 정신없던 몇 해 전 칠월에,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져 왼팔을 깁스한 채로 그 뜨거웠던 여름을 보냈던 적이 있다. 작업실은 벽에 기대어 둔 그림들과, 바닥에 펼쳐놓은 그림들과,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난장판이었고 불편한 팔로 치우기도 번거로워서 바닥의 그림들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서 다니곤 했다.


그날도 새벽까지 작업을 한 뒤, 더운 열기가 밤새 빠져나갈 수 있게 창문을 열어둔 채 집으로 갔는데 다음날 점심때가 가까워 작업실로 다시 오니 들어오는 순간 무엇인가 달라진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다녀간 듯한 인기척이 들어서 섬찟했는데 급한 마음에 휙 둘러보니 펼쳐놓은 그림들은 멀쩡히 그대로 있어 예민한 시기라 괜한 착각을 했나 보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책상에 앉아 혼자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으니 그제야 책꽂이 한쪽에 놓아둔 유리병 속의 오백 원짜리 동전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멍해진 상태로 다시 바닥의 그림들을 꼼꼼히 살펴보니 정말 고맙게도 발자국 하나 없이 그 미로처럼 펼쳐놓은 그림들 사이사이로 귀여운 좀도둑은 만리 같은 길을 지나 책꽂이의 동전만 싹 훔쳐 달아났던 것이었다. 열린 창문을 넘어 들어와, 그림보다 빛나는 동전만 귀신같이 가져갔던 것이다. 

아! 얼마나 고마운지!

컴퓨터도 그대로 있고, 그보다 가벼운 카메라도 그대로 있고, 그보다 훨씬 가벼운 그림들도 그대로 있고...... 그림들은 그대로 있고...... 그림들마저 그대로 있고......

훌륭한 놈, 치사한 놈, 눈물 나도록 고마운 놈, 천벌 받을 놈.


내 작업실에서 가장 빛나고 탐나는 물건은 기껏 오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그래도 고군분투하며 그린 그림들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아줘서 무사히 전시를 마칠 수 있었고, 지금도 진심으로 그놈(?)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아마도 동네의 노숙자나 철없는 꼬맹이들의 소행으로 여겨졌는데,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절박함에 처해있을 때 자신에게 가장 빛 나보이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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