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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20. 2024

만남과 이별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메콩강변으로 내려가서 야외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카오삐약을 주문했다. 체크무늬 테이블과 진한 갈색의 나무의자, 대나무로 이어 만든 울타리가 쳐진 식당의 인테리어가 촌스럽지만, 투박한 조화를 이루면서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음식을 기다리며 메콩강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하하, 여기서 또 만나는군."

숙소에서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두 명의 백인 남자였다.

"아, 네. 식사하러 오시는 길인가요? 앉으세요."

두 사람은 내 테이블에 합석하며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저는 카오삐약을 주문했어요. 뭘 드실 건가요?"

내가 메뉴판을 보며 설명하자, 자신들은 아직 생각이 없다며 비어라오 한 병과 커피를 주문했다. 내가 가방에서 바나나를 꺼내 건네주자 웃으며 농담을 했다.

"여기 온 뒤로 원숭이가 된 느낌이야."

"하하, 바나나 많아요. 더 필요하면 이야기해요."

"하하, 그러지. 난 라이나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농담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난 테오, 당신은?"

옆에 있던 남자도 안경을 고쳐 세우며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난 홍이라고 해요. 한국에서 왔고요."

두 사람 모두 상기된 얼굴로 조금 지친 모습이었지만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독일에서 왔어. 우정여행이지. 테오와 난 올해 50년 되었거든. 하하."

"50년이요? 아니 그럼 두 분 연세가...?"

"70살이야. 우리가 70이라니 하하. 그렇지 테오?"

"와우, 50주년을 기념하는 우정여행이라니, 멋지네요!"

허름한 티셔츠를 입고 비싸지 않은 숙소에 머물면서 여행을 다니는 두 사람이 순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나이가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그 나이에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인들은 나이를 떠나서 대개 간편한 복장으로 다니고, 최대한 아껴 쓰면서 장기간 여행하는 경우를 많이 본 것 같다.


"여기는 처음인가요?"

"루앙프라방만 두 번째지. 다른 곳은 가보지 않았고. 홍은?"

"저는 루앙프라방이 처음이에요. 이따가 비엔티안으로 가는데 너무 좋아서 여기 계속 있고 싶네요."

"그렇지, 여긴 정말 좋아. 그래서 내가 라이나를 데리고 왔지. 허허."

테오가 라이나를 보며 웃었고, 라이나도 어깨를 어쓱하며 미소 지었다.

"그럼 두 분은 얼마동안 여행하시는 거죠?"

"우린 파타야에서 보름 정도 있다가 여기로 왔는데, 다시 치앙마이 잠깐 들렀다가 파타야로 갈 거야. 라이나는 치앙마이에서 독일로 돌아갔다가 다시 파타야에서 합류할 거고."

"와 멋지네요. 장기여행이군요."

"그렇지. 이제 둘 다 은퇴했으니 뭐. 그래도 마누라는 챙겨야지. 그래서 라이나도 독일에 들어갔다 오는 거고. 허허."

"하하, 부인들도 같이 다니시면 될 텐데..."

"아니야. 다니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다들 늙었어. 허허."

라이나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근데 홍은 몇 살인가?"

"한번 맞춰보세요."

나는 왜 자꾸 나이를 묻는 질문마다 맞춰보라고 하는 것일까.

"글쎄, 마흔, 마흔 하나?"

"마흔아홉 살이에요."

"굿! 아주 동안이군. 좋은 나이야! 우린 저나이때 뭘 했지, 라이나?"

테오가 나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라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열심히 일하고... 잘 놀고... 애들 키우고, 뭐 그랬지 않나?"

좋은 나이라, 그렇군.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늘 좋은 나이인지도.

"두 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 나는 건축가였고, 라이나는 인터넷 관련일을 했어. 홍은 무슨 일을 하나?"

"멋지네요. 저는 화가예요."

"와우! 예술가군. 자네."

"제가 두 분을 한번 그려보고 싶은데요."

"오 정말? 우리야 영광이지!"

두 사람은 어색함도 없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온화하고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두 사람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와우! 굉장하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멋지게 그리다니!"

펜으로 크로키형식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니 테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라이나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그림을 사진으로 촬영해도 되겠나?"

"물론이죠!"

테오가 자신의 휴대폰을 그림에 갖다 대고 몇 번에 걸쳐 사진을 촬영했다.

"더 젊게 그려줘서 고맙네. 허허."

"아니에요. 모델이 되어줘서 고맙습니다. 사실 여행 와서 그림을 많이 그리려고 했었는데 그러질 못했거든요. 너무 오랜만에 여행이라 구경하고 뭐... 하하..."


갑자기 바람이 휙 하고 불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위를 쳐다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저는 오늘 비엔티안으로 가요. 거기서 3일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아, 그렇군. 우리도 이따가 치앙마이로 갈 거야. 시간이 남아서 잠깐 산책 나온 거지."

"그랬군요. 여기는 정말 떠나기가 아쉬워요. 근데 두 분 푸시산 가보셨어요?"

"we are oldman."

테오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하며 라이나를 바라보자, 라이나가 어깨를 어쓱하며 웃어주었다. old man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우리 모두에게 오래된 미래쯤 되는 말일까. 

내가 푸시산에 올라가서 감동에 젖어 바라보았던 이곳의 풍경을 테오와 라이나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네 혹시 카셀 도큐멘타라고 알고 있나?"

"잘은 모르고요, 이름정도만 들어봤어요."

"내 명함이야. 혹시 오면 꼭 연락해. 5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니까 아마 2027년도에 열릴 거야. 아주 멋진 행사야!"

테오가 명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 꼭 가보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일부러 연출이나 한 것처럼 순간순간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머리 위로 흩날렸다. 루앙프라방의 아름다움, 여행하는 것의 즐거움, 카셀이라는 도시 이야기, 그리고 라이나의 어린 딸 이야기. 우리는 그늘진 메콩강변에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우리는 짐을 챙기러 가야 하네. 우리와 시간을 보내줘서 고마워.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어."

라이나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건넸고, 테오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건강하게 여행하세요."

"자네도."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일어서서 느릿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식당의 대나무울타리가 쳐진 담을 지나, 햇볕이 드리운 얼굴로 테오와 라이나가 동시에 돌아보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같이 손을 흔들어주자, 테오가 라이나의 등을 가볍게 밀며 두 사람은 다시 느릿하게 뒤돌아 서서 걸어갔다.


나를 기차역에 데려다줄 밴 기사는 정확히 4시 10분에 숙소에 왔다. 여주인은 마당에 나와서 활짝 웃는 얼굴로 배웅해 주었다.

나를 태운 밴은 근처를 한 바퀴 돌면서 역으로 가는 여행객들을 몇 명 더 태웠다. 꽝시 폭포로 가는 밴에서 만났던, 큰 배낭을 각자 두 개씩 짊어진 서양인 커플이 마지막으로 탑승하고 밴은 역을 향해 출발했다.


짧은 만남과 이별, 우리는 모두 어떠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와서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것일까. 만나야 될 사람은 만나기 마련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때로 추하기도 하다. 그 만남의 선택도, 결과도, 모두 인연에 따라 흘러가는 것일까. 나는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것은 인연에 의한 것일까, 나의 의지에 의한 것일까.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여행을 생각하는 것은,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설렘을 기다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묘한 감정의 한가운데에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3등석의 기차칸에는 딱딱한 의자 위에 셀루리안 블루색 천이 엉성하게 덮여 있었다. 등급에 따라 요금이,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3등석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좌석에 앉아, 오래전 화집에서 보았던 오로네 도미에가 그린 3등석 열차를 떠올렸다. 난방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기차 안에서 젖을 꺼내어 아기에게 물린 여인을 전경으로, 승객들이 빼곡히 들어찬 3등석 기차 안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오로네 도미에의 그림 속 인물들은, 각자의 체온과 체온이 섞여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그러나 여기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라오스.


객실에 차례로 탑승하는 승객들의 절반 이상이 서양인들이었고, 예외 없이 큰 배낭들을 가져와서 좌석 위 선반에 빼곡히 정렬하느라 어수선했다. 3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과, 2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통로를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는 객실에는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였다.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차승무원이 과자와 음료수, 빵등이 실린 카트를 밀며 통로를 지나갔다. 내가 앉은자리 건너편 3인석 자리에는 라오스인 부부가 할머니와 세명의 어린 남매와 함께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칭얼거리는 막내를 다독이고, 제일 맞이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자신에게 바짝 붙어 심심해하는 여동생에게 장난을 치며 웃게 해 주었다. 승무원이 카트를 싣고 다시 되돌아오자 막내가 과자를 가리키며 칭얼거렸고, 오빠와 장난치던 여자아이는 잠깐 카트를 바라보다가 애써 외면하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의 아빠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보는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가 민망하지 않게 웃어주었다. 

아이들의 엄마가 가방에서 찹쌀밥이 든 비닐과, 양념으로 보이는 음식물이 든 비닐을 꺼내어 딸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조물거려 찹쌀밥을 동그랗게 뭉친 딸아이가 양념을 조금 얹어 할머니의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받아먹었고, 딸아이는 그렇게 똑같은 방식의 밥을 만들어 막내부터 아빠와 엄마, 오빠까지 차례로 나누어주었다. 

혹시나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창에는 내 얼굴과, 실내등 불빛과, 라오스인 가족들의 모습이 꼴라쥬처럼 범벅되어 창에 어른거렸다.


양손에 보따리 가득 들고 딸린 자식들을 챙기는 것도 모자라, 갓난아기를 등에 꽁꽁 싸매고 시외버스와 기차를 타고 귀향하던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가난했던 시절 우리 부모들이 꿈꿨을 희망의 색깔과, 지금 여기 라오스 인들이 꿈꾸는 희망의 색깔이 같을 수 있을까. 

그 색깔이 어떠한 것이든 종내는 행복한 것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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