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은 기억

막내가 사라졌습니다

by 리뷰몽땅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흔한 일이라고들 하지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듣고 넘어가곤 하지만

지난 밤은 너무 길었습니다. 12시가 지나고

1시가 지나고 2시가 지나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어둠 따위 겁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후

나는 작정을 하고 친구와 언니를 데리고

남편의 뒤를 밟았습니다. 남편이 새로 만나는 년이 누구인지

나는 꼭 알아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 피우는 바람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냐고 큰 언니는 말했어요.

니 남편이 이런 난봉꾼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며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 언니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말없이 나를 따라 나섰습니다. 사실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어요.

언니는 무척 키가 작고 몸집이 작았으며 목소리도 작았으니까요.


작은 방이었습니다. 여자는 곱게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봐도 예뻐서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저런 여자면 남편이 좋아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 때였습니다. 평소에 소리 한 번 지르는 일 없는 큰 언니가

여자의 뺨을 후려 갈겼습니다. 여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하는 짓이냐며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 때부터 셋이서

여자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눈에 보이는대로 던지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방에서 슬그머니 나왔습니다. 비겁한 놈이었죠.

마누라와 내연녀가 죽을 듯이 싸우고 있는 마당에

남편은 구두를 신고 "고만 해라"는 말만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문을 열고 나가 버렸습니다.




옛날의 기억은 밤새도록 나를 괴롭힙니다.

어떨 때는 마치 눈 앞에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림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지르며

과거의 그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있는 힘껏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데 날이 밝으면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어제밤만큼은 머리가 맑았어요.

나는 막내의 집으로 찾아가 막내 사위를 집어 뜯을 생각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막내를 불행하게 만든 그 놈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대문을 나섰습니다.




대문을 열고 나갔던 남편은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막내는 마룻바닥에 상을 깔고 앉아서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막내의 손을 잡고

남편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어요.

남편도 막내를 예뻐했으니까요.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막내 앞에서만큼은 소리를 지르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남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날은 달랐습니다. 남편의 눈에 막내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쉬지 않고 날아오는 매질에 나는 소리조차 나오질 않았고

초등학교 1학년이던 막내는 남편의 팔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세상이 너무 달라져 있었어요.

나는 막내의 집 주소를 들고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어요.

막내의 집이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의 집이라고 말했죠.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던 기사는 내게 돈이 있냐고 물었어요.

늙었다고 사람을 무시하는건가 라는 생각에 발끈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습니다. 그리고 지갑을 들어 보여줬어요.


기사가 내려준 곳은 너무 낯설었습니다.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막내가 사는 집이 언제 이렇게 바꼈나는 생각에

나는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까마득해졌어요.




그 날 막내는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까무러친 아이를 업고 처음으로 남편과 내가

한 몸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는 막내를 침대에 눕히고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물었어요.

그런 의사가 무척 고맙기도 했죠.

나에게 괜찮은지 물어봐주는 사람이 얼마나 오랫만이었는지.

하지만 그 물음에 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주 작은 내 딸아이가 헝클어진 머리로

마치 죽은 듯이 누워 있었으니까요.

남편은 막내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고

나는 맞은편에서 막내의 얼굴을 만지며 이름을 불렀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어느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손이 덜덜 떨렸어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간신히 큰 딸의 전화번호를 눌렀습니다.


야야. 막내가 사라졌다. 막내가 없어졌다.


엄마 어딘데, 거기 어딘데.


우리 막내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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