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 힘이 든 하루였다. 퇴근하는 남편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말 안해도 알 것 같았다. 오늘이 마지막날이구나. 이번에는 꽤 오래 버텼다. 이제는 화가 나지도 않는다.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맞으며 나는 남편의 손을 끌고 남산에 올랐다.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한없이 미안했을테고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막막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감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시원섭섭하달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철컹. 하고 자물쇠가 잠기는 순간. 그는 나에게 큰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참 기뻤던 그 날이 문득 떠올랐다.
남산의 루프탑 위에는 여전히 많은 자물쇠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몇 해는 거뜬히 견뎌온 그들은 표면이 바래고 녹이 슬긴 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
무작정 남편에게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했었다. 가장이라면 버텨야 한다. 자물쇠처럼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악물고 버텨라.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 맞지 않는 남편이었다. 속된 말로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해야할까. 현대 사회에서 사회성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도무지 조직생활을 버텨낼 수 없으니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지면서 남편은 정규직에서 프리랜서로 전향을 했다. 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그 자리를 지키라고 했다. 제발 지켜달라고 사정도 했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버티고 버티다가 남편은 계약서를 집어던지고 나왔다. 아니 그가 던진게 아니라 파기된 계약서를 그가 받아들고 왔다는 말이 맞겠다. 나이가 들어서였을까. 나는 문득 남편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여러가지 일이 터지면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늘어났다. 늘 그렇게 감당하며 살았으니 이제 익숙해질법도 한데 참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으니 라는 말로 위로를 했다.
4.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무거운 족쇄처럼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순간들이 더 많다. 그럴 때는 그냥 맞아야 한다. 한 대 때리면 한 대 맞고 두 대 때리면 두 대도 맞고 그렇게 맺집을 키워나가야 한다.
연애시절 남편과 함께 걸어두었던 자물쇠는 녹이 슬고 바람에 낡아 언젠가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흔적이 될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의 약속은 여전히 남아있다. 서로에게 힘이 되자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자고 했던 약속 말이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나의 일자리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오늘 하루도 버티면서 내일 하루를 기대하는 수 밖에. 남편이 미우냐고? 밉다. 솔직히 말하면 밉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에게 버팀목이 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는 모습은 기특하고 고맙다.
녹이 슬어도 빛날 수 있는 사랑을 위해 우리는 오늘 하루도 그저 묵묵히 이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