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Francisco, Sight Glass Coffee
LA의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샌프란시스코로 바로 넘어왔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던 샌프란시스코는 반팔에도 더웠던 LA와 다르게 외투 하나씩은 꼭 챙겨 다녀야 할 만큼 쌀쌀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렌터카를 가지고 숙소로 출발했다. 차와의 전쟁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무서운 소문에 늘 긴장하면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차 안에 귀중품을 보이게 두지 말라는 경고가 늘 따라다녔는데, 길거리의 강도들이 차 유리를 깨고 귀중품을 들고 달아나는 게 다반사란다.
소문만 들었으면 그럭저럭 조심했을 테지만, 주차장에서 차를 수령하고 나가는데 창문이 깨진 차를 끌고 들어오는 다른 손님을 2팀이나 발견했다. 그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했고, 일단 짐을 가지고 숙소에 먼저 가야겠다 싶었다. 이후로는 차에서 내릴 때마다 휴대폰 거치대까지 다 빼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우리 차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부디 차를 가만히 두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Sightglass라는 이름은 독특하게도 로스팅 머신에 있는 부품에서 따왔다고 한다. 로스팅 머신에는 커피가 볶이는 복잡하고 섬세한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유리로 된 작은 창이 있다. 그것을 영어로 sightglass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 작은 유리창으로 로스팅 과정을 보는 것처럼, 손님들이 소비하는 커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커피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고리가 된다고 한다.
지금은 꽤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사이트글래스는 20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은 서비스 카트 하나로 장사를 시작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창고의 구석에서 핸드드립 기구 몇 개와 작은 에스프레소 머신 하나였지만, 점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2년 후에는 그 창고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될 만큼 성장했으며, 그곳이 이 브랜드의 본부가 되었다.
바로 그 창고가 있던 자리, 즉 이 브랜드의 본부가 바로 이번에 방문했던 매장이다. 뒷 이야기를 모르고 간 사람들은 매장의 인더스트리얼한 디자인을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 건물의 용도 자체가 원래 창고였다. 그리고, 이 건물 전체가 로스팅 공장으로서, 카페로서, 교육장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직사각형의 아트리움 형태인 2층 매장은 크게 네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천장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는 1층은 로스팅과 패키징의 공간과 커피를 만드는 바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카페 한쪽으로 매우 커다란 로스팅 머신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머신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패키징 공간에서는 많은 직원들이 커피를 포장해서 상자에 담아내고 있었다.
2층은 중앙이 뚫려 있는 손님들이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과 사무실 및 교육 공간으로 나눠져 있었다. 자연광이 쏟아져 내려오는 커다란 창이 뚫려 있는 곳 아래로 교육장과 사무실 공간이 있었는데, 그 구조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서 좋은 볼거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중앙이 막혀있지 않고 뚫려있어서 중앙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1층 작업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일행들은 2층에 자리를 잡게 하고 혼자서 길게 줄을 서있는 사람들 뒤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에스프레소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카푸치노와 몇 개의 디저트를 주문했다. 대다수의 미국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으며 나의 이름을 물었다. 외국인들은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성 한 글자만 이야기해주면 바리스타들이 훨씬 편하게 알아듣는다.
주문이 끝난 후에 매장을 둘러보는데, 바쁘게 일하는 바리스타들의 개성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은 아프로 머리를 한 남자 바리스타였는데, 부풀어있는 아프로 머리에 초록색 빗을 꼽고 있었다. 그리고 수염을 길게 기른 모자 쓴 바리스타는 인터뷰를 도와주기도 하고, 원두를 구매할 때 매우 친절하게 질문에 답해주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수많은 손님들에 대한 이유를 맛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커피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는데, 디저트에서는 살짝 놀랄 정도였다. 시금치가 들어가 있는 스콘과 라즈베리 잼 필링의 크로와상이 정말 훌륭했다.
커피와 디저트를 깔끔하게 먹고 난 뒤, 인터뷰를 하고 커피 원두도 구매할 겸 1층으로 내려갔다. 그때도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기 때문에, 원두를 먼저 고르면서 기다려야겠다 싶어서 매대 앞에서 원두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긴 수염의 모자 쓴 바리스타가 걸어와서 원두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안녕하세요, 커피는 괜찮았나요? 원두 구매하시려고요?"
"네, 안녕하세요! 커피랑 디저트 다 맛있게 먹었어요. 직접 사서 내려마시고 싶어서요"
"오, 그럼 어떤 원두를 찾으시나요?"
"산미가 있고 과일이나 꽃처럼 다양한 향이 있는 게 좋아요"
"아, 그럼 잠시만요. 아까 전에 마지막으로 그게 나간 것 같은데, 한번 더 찾아볼게요"
그렇게 안쪽으로 뛰어갔다 온 바리스타는 정말 운이 좋게도 하나가 남았다고, 내가 딱 좋아할 만한 원두인 것 같다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게이샤 품종의 원두라 저렴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원두에 비해서 엄청 비싼 편도 아니었다. 너무나 친절하게도 직접 뛰어갔다 오는 바리스타의 노력에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원두의 품종과 가격
종종 원두를 사러가보면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걸 볼 수 있다. 또, 핸드드립 커피 메뉴도 이상한 이름이 붙은 건 금이라도 발라놨나 싶을 정도로 비싸다. 커피 한 잔을 그렇게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설명을 들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커피 원두의 품질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너무나도 많지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해발고도'이다. 커피의 산미가 좋고 꽃과 과일 향이 화사하고, 캐릭터가 선명한 특징을 가진 대부분의 커피 품종은 높은 해발고도에서 자란다. 특히 위와 같은 캐릭터가 특징인 '게이샤'라는 품종은 대부분 해발고도 1,900m 이상에서 재배된다. 여러분들도 게이샤는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다른 품종과 섞이지 않은, 단종 게이샤만을 '게이샤'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품종은 에티오피아에서 유래되었으며 시대가 지나면서 탄자니아, 파나마 등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커피 잎이 시들해지면서 나무 전체가 점점 죽어가는 '커피 녹병'에 약해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 품종이었다. 하지만, 2005년에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때는 2005년, 베스트 오브 파나마(Best of Panama)라는 대회에서 우승한 '라 에스메랄다' 농장의 파나마는 파운드당 $20에 낙찰되었다. 감이 잘 오지 않는가? 그 해에 2위를 차지했던 원두는 파운드당 $8.20 였으며, 20위를 차지했던 원두는 파운드당 $1.55 였다. 실로 파운드당 $20라는 가격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환산하면 20kg짜리 '생두' 한 백에 약 102만 원 정도다). 그리고 이 에스메랄다 파나마의 환상적인 캐릭터는 '신의 커피'라는 책으로도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게이샤처럼 고급 품종으로 여겨지는 커피나무는 평탄한 저지대가 아니라 높은 고도에서 재배하기 때문에 커피 체리를 기계로 수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잘 익은 커피 체리를 하나하나 따야 한다. 또 그럼, 그렇게 힘들게 수확한 커피를 대충 씻고 말릴까? 아니다. 커피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하루에 두세 번씩 커피를 뒤집어가며 정성 들여 말려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폐 창고에서 카트 하나로 시작한 사이트글래스는 약 10년이 지난 지금, 샌프란시스코와 LA에 총 4개의 대형 매장을 가진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리고 매장의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에 원두를 납품하는 단단한 기업이기도 하다. 매 에피소드마다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그 성공의 원동력은 바로 사람인 것 같다. 겨우 원두 한 봉지였지만 신난 얼굴로 커피를 가지러 뛰어다니는 그 바리스타처럼, 한 사람이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는 한 명의 손님에게 전해진다. 브랜드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진 그 손님은 또 다른 손님과 함께 다시 찾아온다. 이렇게 한 명씩 늘어나, 결국엔 대형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