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따라 세계일주 - 가오슝, 가바가이 카페
Kaohsiung, Gavagai Cafe
(c)만얼 | 아이허 강(LOVE RIVER) 야경
가오슝에는 아이허 강(LOVE RIVER)이라는 유명한 강이 있다. 가오슝 시내를 가로지르는 큰 운하인데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정말 많다. 강을 끼고 있는 풍경과 야경이 아름답고, 주위로 놀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주위에 가볍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가 많아서 밤에 산책하고 맥주 한 잔 하기도 딱 좋다.
관광과 데이트 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아이허 강도 옛날에는 생계를 위한 운송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대만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런 데서 오는 것 같다. 예로부터 이어져온 것들을 다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낸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으로.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문화원구도 마찬가지로 옛날에 공장 같은 것으로 쓰였던 건물을 개조해서 문화와 창작의 공간으로 사용한다.
대만의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우리도 가끔은 어떤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생각 없이 무작정 버리거나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비단 장소나 물건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습관이나 말투, 상대방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의 가치를 재발견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c)만얼 | 가바가이 카페 정면
가바가이 카페는 아이허 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갈 수 있다. 아오쯔디라는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데 생각보다 멀다. 지하철로 약 30분 정도를 가야 했기 때문에 다른 일정 사이에 추가하기 애매했으나 다행히 함께 여행하는 친구와 낮 시간 동안 따로 다니기로 했기 때문에 가볼 수 있었다. 메이선 카페의 바리스타가 이곳을 추천해주면서 주인이 약간 특이하다며 가보면 재미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다.
너무 일찍 도착했던 탓일까? 카페의 문이 열려 있지 않았다. 낭패였다. 미리 영업시간을 알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신났나 보다. 구글 지도를 보니 곧 영업이 시작할 시간이긴 했지만 외국의 낯선 동네였고 주인장 마음대로 카페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일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이 카페 투어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늘 그 상황이 달갑지는 않다.
(c)만얼 | (좌) 카페 내부 (우) 심심함을 달래주었던 고마운 고양이
카페 앞에서 얼쩡대고 있는 고양이와 놀던 중에 카페 주인이 왔다. 이 카페를 추천해 준 바리스타의 말대로 비범한 외모의 주인이었다. 인상적인 수염에 긴 머리를 한 채로 자연스럽게 문을 열면서 카페를 찾아온 거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미안하지만 준비를 해야 하니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고,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한다. 흔쾌히 알겠다 대답한 후에 다시 고양이와 놀고 있으니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금방 준비를 끝낸 듯 이제 머리를 묶기 시작하는 바리스타.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커다란 덩치 때문에 무섭게 생겼다고도 할 수 있지만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 그는 너무나도 푸근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나요?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관광객은 여기까지 잘 오지 않는데"
"메이선 카페의 바리스타가 추천해주었어요. 여기 커피도 제가 좋아할 거라던데요? 여행을 왔는데, 카페 투어도 하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카페 투어라니, 재미있을 것 같네요. 약간은 부담이 되는걸요?"
"하하, 아니에요.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커피 한 잔씩 마시는 걸 좋아할 뿐이에요"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메뉴판을 빠르게 훑어보고 나서 바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과테말라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였다. 관광객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손으로 써서 코팅해놓은 메뉴판에는 중국어 밑으로 영어가 적혀 있었고 일일이 물어보거나 번역기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주문 후에 카페를 둘러보니 전체적으로 나무로 장식되어 있는 카페가 참 아늑했다. 군데군데 나무로 된 소품과 액자, 그리고 예쁜 무니의 종이로 된 섬세한 조명까지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카페 안쪽 끝의 화장실로 가는 바깥 통로는 작은 정원처럼 꾸며놓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볼법한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c)만얼 | (좌) 과테말라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 (우) 에티오피아 싱글 오리진 필터커피
곧이어 나온 커피는 너무나도 깨끗하고 달았다. 사탕수수 즙을 먹으면 느낄 수 있는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은 단맛에 끝에는 살구 같은 느낌이 맴돌며 마무리해주었다. 커피가 맛있어서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노트에 맛을 기록하고 있으니 수염을 길게 기른 바리스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듯 추가로 필터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렇게 나온 필터 커피도 상당히 맛있었다. 시중에 있는 많은 에티오피아 커피는 화사하고 선명한 산미가 돋보이도록 로스팅을 하고 추출을 하는데 이곳의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면 느끼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운 버터 같은 느낌의 묵직한 에티오피아 커피였다. 그렇다고 해서 향이 적은 커피도 아니었다. 얇은 실크 여러 장이 겹쳐 있는 듯 섬세한 향이 맴돌았다.
커피의 지방(Fat)
"당신이 마시고 있는 그 커피는 지방 성분이 매우 많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겠는가? 뭔가 그 커피를 마시기가 부담스러워지지 않는가?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커피를 추천하면서 그런 말을 해준다면 기꺼이 그 커피를 마셔볼 것이다.
보통 지방이 있다고 하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바라보기 마련이다. 우리를 살찌게 하고 심하면 병들게 하는 성분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음식에 있어서 지방은 필수 성분이다. 부드러운 맛과 질감, 오래 지속되는 향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의 중요성은 커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지방성분이 가지고 있는 고유 성질 때문인데 커피의 지방성분은 향기 성분을 잘 녹여내며 그것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머금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지방성분이 더 많은 커피를 마셨을 때 더 풍부한 향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카페에서 마신 커피들도 지방 성분이 많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히 에티오피아 커피에서 느꼈던 버터 같은 느낌과 섬세한 향의 표현은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만족스럽게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바리스타는 커피가 괜찮았냐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마치 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나도 커피가 정말 맛있었고 다음에 가오슝에 오면 꼭 다시 오겠다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카페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바리스타가 바에서 나와서 뭔가를 건네주었다. 받고 보니 그 카페에서 만들어 팔고 있는 드립백 커피였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당황스러워서 나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미안해서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자기 마음이라고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대신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커피를 마셔야 한단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어 가며 카페에서 멀어졌다.
(c)만얼 | 바리스타가 갑자기 건네준 드립백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