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8장: 베타시티 협동조합
한 달 후.
마나밸리. 폐창고.
정민은 문 앞에 섰다.
철문이었다. 녹이 슬어 있었다. 갈색. 군데군데 붉은 점.
손잡이도 녹슬어 있었다. 잡았다. 차가웠다. 거칠었다. 손바닥에 녹 가루가 묻었다.
밀었다.
삐걱. 소리가 울렸다. 길게. 창고 안까지.
안으로 들어갔다.
넓었다. 천장이 높았다. 5미터쯤. 철골이 보였다. 녹슨 것. 거미줄이 있었다. 구석에.
창문이 위쪽에 있었다. 먼지가 끼어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먼지가 떠다녔다. 금빛. 숨 쉴 때마다 먼지가 움직였다.
바닥이 콘크리트였다. 금이 가 있었다. 풀이 틈에서 자라고 있었다. 죽은 것도 있었다. 누런 것.
구석에 나무 팔레트가 쌓여 있었다. 낡은 것. 몇 개는 부서져 있었다.
못이 삐져나와 있었다.
냄새가 났다. 먼지. 나무. 쇠. 오래된 냄새.
가운데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나무. 긁힌 자국. 누가 가져다 놓은 것.
아카데미에서 쓰던 것 같았다.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접이식. 찰칵 소리 나는 그것.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하린. 테이블 왼쪽. 손에 종이를 들고 있었다. 메모가 적혀 있었다. 손글씨.
지안. 테이블 오른쪽.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스테이플러로 찍고 있었다. 찰칵. 찰칵.
동욱. 테이블 끝. 팔짱을 끼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지난번 회의 때와 같았다.
수연. 동욱 옆. 밀가루 손 여자. 앞치마는 없었다. 오늘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꽃무늬. 긴장한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원피스 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르는 얼굴. 젊었다. 삼십 대 초반쯤.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정민이 빈자리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울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딱. 딱. 딱. 소리가 창고 안에서 울렸다.
“다 왔네요.”
지안이 말했다.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A4. 여러 장. 스테이플러로 묶여 있었다.
“정관 초안이에요.”
사람들이 서류를 봤다.
정민도 봤다.
첫 페이지. 제목.
‘베타시티 협동조합 정관(안)’
협동조합. 재단이 아니었다. 정민이 바꾼 것.
파견지에서 배운 것. 런던 펍. 클리블랜드. 1인 1표.
지안이 펜을 들었다. 빨간 펜.
“읽어볼게요. 중요한 것만.”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소리가 났다. 바스락.
“제3조. 목적.”
읽었다.
“본 협동조합은 마나밸리 지역의 지속가능한 도시운영을 위해
교육, 실험,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을 수행한다.”
동욱이 팔짱을 풀었다.
“도시운영이요. 그게 뭔데요?”
“하던 거예요.”
지안이 말했다.
“아카데미. 청소 당번. 화분. 그런 것들.”
“그걸 왜 협동조합으로 해요?”
“안 끊기려고요.”
지안이 동욱을 봤다.
“예산 끊기면 끝이잖아요. 센터처럼.”
동욱이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다시 꼈다.
지안이 페이지를 넘겼다.
“제7조. 지분 구조.”
읽었다.
“시 30%. 구청 25%. 시민 20%. 상인 15%. 전문가 10%.”
수연이 손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시민 20%요. 그게 뭐예요?”
“조합원이에요.”
지안이 말했다.
“돈 내는 사람. 10만 원 단위로.”
“10만 원 내면 조합원이에요?”
“네. 1인 1표.”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피스 단을 만지작거렸다.
“돈 많이 내도 1표요?”
“네.”
“왜요?”
지안이 정민을 봤다.
정민이 입을 열었다.
“런던에서 봤어요.”
사람들이 정민을 봤다.
“펍이 있었어요. 주민들이 샀어요. 371명이.”
“펍을요?”
동욱이 물었다. 눈썹이 올라갔다.
“네. 1인당 50만 원씩.”
정민이 서류를 봤다.
“많이 내도 1표. 적게 내도 1표. 그래서 12년 동안 유지됐어요.”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린이 서류를 봤다.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손톱이 짧았다. 깨끗했다.
“여기요.”
지안이 봤다.
“제12조요.”
하린이 읽었다.
“협동조합 운영 참여자에게 활동비를 지급할 수 있다.”
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요?”
“정해야죠.”
하린이 서류를 봤다. 손가락이 멈춰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얬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솔직히.”
하린이 말했다.
“저 월세가 45예요.”
사람들이 하린을 봤다.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관리비 6. 합하면 51.”
하린이 서류에서 손을 뗐다.
“봉사로는 못 해요.”
조용했다. 창고 안에. 먼지가 떠다녔다. 햇빛 속에서.
지안이 하린을 봤다.
“알아요.”
“그래서요?”
“활동비 잡을 거예요. 월 30. 일단.”
“30이요?”
“시작이요.”
하린이 지안을 봤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안이 하린을 봤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민 씨가 그랬어요.”
“뭘요?”
“65%면 시작한다고.”
하린이 정민을 봤다.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하린이 입을 다물었다. 3초.
“…알았어요.”
서류를 다시 봤다.
동욱이 손을 들었다.
“저도 질문.”
지안이 봤다.
“제15조요. 건물주 참여 인센티브.”
동욱이 서류를 들어 보였다. 손가락으로 줄을 짚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지안이 서류를 봤다.
“읽어드릴게요.”
읽었다.
“협동조합 활동에 참여하는 건물주에게 차등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
세제 감면 추천, 수선비 보조, 장기 계약 보너스.”
동욱이 팔짱을 풀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장기 계약 보너스요?”
“네. 3년 이상 동결하면 보너스.”
“얼마요?”
“정해야죠.”
동욱이 지안을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정해지면 말해요.”
“같이 정하는 거예요.”
지안이 말했다.
“다음 회의에서.”
동욱이 입을 다물었다.
서류를 봤다. 눈이 움직였다.
조건들을 읽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지안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서명란이에요.”
빈 칸이 있었다. 여섯 개. 이름. 날짜. 서명.
“오늘 서명하면 창립 멤버예요.”
사람들이 서류를 봤다.
조용했다. 5초. 10초.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비스듬하게. 서류 위에 빛이 떨어졌다.
수연이 먼저 펜을 들었다.
“저요.”
손이 떨렸다. 조금. 펜 끝이 흔들렸다.
서명했다. 천천히. 손글씨.
‘수연. 2027년 10월 15일.’
펜을 내려놓았다. 탁. 숨을 내쉬었다.
다음.
지안이 서명했다. 빠르게. 망설임 없이.
‘지안.’
다음.
두 사람이 서명했다. 청년들. 노트북 들고 온. 이름을 몰랐다.
동욱이 펜을 들었다.
잠깐 멈췄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1초. 2초.
서명했다.
‘동욱.’
내려놓았다. 탁.
하린이 펜을 들었다.
서명란을 봤다. 빈 칸. 하나.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의 손. 펜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
하린이 숨을 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서명했다.
‘하린.’
펜을 내려놓았다. 탁.
정민을 봤다.
“정민 씨 차례예요.”
정민이 펜을 들었다.
서명란을 봤다. 빈 칸 하나. 마지막.
펜을 댔다.
썼다.
‘정민. 2027년 10월 15일.’
손이 떨리지 않았다.
지안이 서류를 거뒀다.
스테이플러로 다시 한번 눌렀다. 찰칵.
“창립 완료예요.”
사람들이 서로를 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3초.
수연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떨리는 웃음.
“이제 뭐 해요?”
“일하죠.”
지안이 말했다.
“다음 주부터.”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렸다. 끼익.
동욱이 먼저 나갔다. 문이 삐걱거렸다. 뒤도 안 돌아봤다.
수연이 나갔다. 손을 흔들며. “다음 주에 봐요.”
청년 두 명이 나갔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지안이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정민 씨.”
“네.”
“다음 주에 공간 정리해요. 여기.”
창고를 둘러봤다. 먼지. 팔레트. 금 간 바닥. 거미줄.
“청소부터요.”
나갔다.
정민과 하린만 남았다.
하린이 창고를 둘러봤다.
천장. 창문. 햇빛. 먼지. 녹슨 철골.
“여기서 해요?”
“응.”
“진짜요?”
“일단.”
하린이 웃었다. 웃음 같지 않았다.
“여긴 행정 냄새가 안 나네요.”
말하고 나서 창고를 다시 봤다. 먼지. 금 간 바닥. 팔레트.
잠깐 멈췄다.
행정 냄새가 안 나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었다. 좋은 건가. 아닌가.
“그 냄새는 환기했죠.”
정민이 말했다.
정민이 걸었다. 창문 쪽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햇빛. 따뜻했다. 먼지가 떠다녔다.
하린이 따라왔다.
정민 옆에 섰다.
“정민 씨.”
“응.”
“저요.”
하린이 창문을 봤다. 밖이 보였다. 마나밸리. 골목.
“30이요. 활동비.”
“응.”
“51이 월세예요.”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이 창문을 보고 있었다.
얼굴에 햇빛이 닿아 있었다. 먼지가 떠다녔다.
“21 모자라요.”
“알아.”
“어떻게 해요?”
정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다른 거 찾아야지.”
“뭘요?”
“일. 아르바이트. 뭐든.”
하린이 웃었다. 웃음 같지 않았다.
“그래야죠.”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정민을 봤다.
“근데요.”
“응.”
“서명했어요.”
“응.”
“왜 했는지 알아요?”
정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린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뭔가를 꺼냈다.
종이. 작은 것. 접혀 있었다.
펼쳤다.
스티커였다. 파란 것. 첫날 받은 것. 아카데미 첫날.
“이거요.”
“응.”
“붙일 데가 필요해요.”
정민이 스티커를 봤다.
동그랗다. 파란색. 손때가 묻어 있었다.
모서리가 살짝 접혀 있었다. 한 달 반 동안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아카데미 다니고. 여기 와서 회의하고.”
하린이 스티커를 접었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붙일 데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서명한 거야?”
“반은요.”
“반은?”
하린이 정민을 봤다.
“30이라도 받으니까요.”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린이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 같았다.
“솔직한 거예요.”
정민은 창문을 봤다.
밖이 보였다. 마나밸리. 골목. 가게들.
저녁이 오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장판 조각이 있었다. 꽃무늬. 손끝에 닿았다. 모서리가 헤어져 있었다.
아직 있다.
창문에 정민의 얼굴이 비쳤다. 흐릿하게.
옆에 하린의 얼굴도 비쳤다.
둘이 서 있었다.
창고 안에.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
금빛에서 주황빛으로.
하린이 움직였다.
테이블로 갔다. 의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찰칵.
정민도 갔다.
의자를 접었다.
찰칵.
소리가 울렸다. 빈 창고에. 높은 천장에.
시작하는 소리.
또.
-계속-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서명했다."
"붙일 데가 생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