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시는 배우지 않는다. 19장: 데이터의 얼굴
몇 주 후.
협동조합 사무실.
창고가 바뀌어 있었다.
바닥이 깨끗했다. 콘크리트 위에 장판이 깔려 있었다.
회색. 새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가져온 것. 중고.
모서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걸으면 뽁뽁 소리가 났다.
거미줄이 없었다. 누가 쓸었다. 하린이었을 것이다.
테이블이 세 개 있었다. 나무. 중고. 긁힌 자국이 있었다.
한 테이블 다리 밑에 종이가 접혀 있었다. 흔들리지 않게.
벽에 코르크보드가 걸려 있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지난달보다 많아졌다.
서른 장쯤.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손글씨들.
그 옆에 새 것이 있었다.
모니터. 32인치. 벽에 걸려 있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푸른 빛이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지도가 떠 있었다.
마나밸리.
골목. 가게. 건물. 색깔이 있었다.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점들이 찍혀 있었다.
정민이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지안이 옆에 있었다.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연결됐어요.”
지안이 키보드를 쳤다. 딸깍딸깍.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면이 바뀌었다. 숫자가 떴다.
‘유동인구: 일평균 1,247명’
‘체류시간: 평균 23분’
‘재방문율: 34%’
정민이 화면을 봤다.
“이거 어디서 나와요?”
“QR이요.”
지안이 화면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에 점이 있었다. 파란 점. 열다섯 개쯤.
“가게마다 QR 붙였잖아요. 지난주에.”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났다.
지난주. 화요일 아침.
하린이랑 돌아다녔다. 마나밸리 골목. 가게마다 들어갔다.
수연네 빵집. 문을 열었다. 빵 냄새가 났다. 고소했다.
“이거요.”
하린이 스티커를 들었다. QR 코드. 흰 바탕. 검은 코드.
“여기 붙여도 돼요?”
수연이 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데요?”
“손님이 찍으면요. 기록이 돼요. 누가 왔는지. 언제 왔는지.”
“그걸 왜 해요?”
“알아야 하니까요.”
하린이 웃었다.
“뭐가 되는지. 안 되는지.”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붙여요. 계산대 옆에.”
하린이 스티커를 붙였다. 계산대 옆 벽에.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찰싹.
그 다음 가게. 그 다음 가게.
정민이 문을 열었다. 하린이 설명했다. 스티커를 붙였다.
찰싹. 찰싹.
열다섯 군데.
손이 끈적거렸다. 스티커 접착제 때문에.
“찍으면 기록돼요?”
정민이 물었다. 현재로 돌아와서.
“네. 시간. 위치. 체류.”
지안이 화면을 터치했다. 점 하나를 눌렀다.
창이 떴다. 그래프. 막대. 색깔.
“이 가게요. 화요일에 사람이 많아요. 토요일엔 적고.”
정민이 그래프를 봤다. 막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왜요?”
“몰라요.”
지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가게 주인이 알겠죠.”
문이 열렸다.
삐걱.
하린이 들어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노트. 낡은 것. 표지가 해어져 있었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검은색 표지. 글씨가 있었다. ‘기록’. 손글씨.
“왔어요.”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테이블로 갔다. 노트를 내려놓았다. 탁.
“오늘 거예요.”
정민이 노트를 봤다.
펼쳐져 있었다. 손글씨. 빼곡했다. 파란 펜. 검은 펜. 섞여 있었다.
날짜. 가게 이름. 숫자. 메모.
‘11/15. 수연네 빵집. 손님 47명. 단골 12명. 비 왔음.’
‘11/15. 동욱 건물 1층. 공실. 문의 2건.’
‘11/15. 골목 청소 당번. 노인회 3명 참여. 낙엽 많음.’
정민이 읽었다.
“이거 매일 써요?”
“응.”
하린이 의자에 앉았다. 털썩. 의자가 삐걱거렸다.
“돌아다니면서. 물어보고. 보고.”
“힘들겠네.”
“힘들죠.”
하린이 웃었다. 피곤한 웃음. 눈 밑에 그림자가 있었다.
“근데 이래야 보여요.”
지안이 노트를 봤다. 몸을 기울여서.
“이거요.”
“네.”
“숫자는 입력할 수 있어요. QR이랑 맞춰서.”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는요?”
“메모요?”
지안이 노트를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비 왔음.’ ‘낙엽 많음.’
“이런 거요. 이건 못 넣어요. 시스템에.”
하린이 노트를 봤다. 자기가 쓴 글씨를.
“그래도 써야죠.”
“왜요?”
“숫자만으론 모르니까.”
하린이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손톱이 짧았다.
‘손님 47명. 단골 12명.’
“47명 왔어요. 근데 12명이 단골이에요.”
지안이 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요?”
“그게 중요해요.”
하린이 정민을 봤다.
“새 손님 35명이요. 다시 안 올 수도 있어요.”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골 12명이요. 비 와도 와요. 눈 와도 와요.”
하린이 노트를 닫았다. 탁.
“그게 진짜 숫자예요.”
정민이 모니터를 봤다.
지도가 떠 있었다. 색깔이 있었다. 초록. 노랑. 빨강.
“저거요.”
지안을 봤다.
“빨간 거요. 뭐예요?”
지안이 화면을 터치했다.
빨간 점 하나를 눌렀다. 창이 떴다.
‘공실률: 40%’‘유동인구: 일평균 89명’
‘체류시간: 8분’
정민이 숫자를 봤다.
8분.
지나가기만 한다는 뜻이었다. 머물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 어디예요?”
지안이 지도를 확대했다. 손가락으로 밀었다. 스르륵.
골목이 보였다. 가게들. 간판들. 글씨가 작았다.
하린이 화면을 봤다.
멈췄다.
“…”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입술이 닫혀 있었다.
눈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린 씨?”
“저기요.”
하린이 화면을 가리켰다. 손끝이 떨렸다. 조금.
“저기 우리 골목이에요.”
정민이 화면을 봤다.
빨간 점.
그 안에 있었다. 예전에.
프래그먼트.
하린의 카페. 3년 동안. 커피 내리던. 단골들 오던.
지금은 부동산이 들어가 있었다. 정민이 돌아왔을 때 봤다.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OO공인중개사사무소’'대표 OOO'.
빨간 점이었다.
공실률 40%. 체류시간 8분.
사람들이 지나갔다. 머물지 않았다.
하린이 화면에서 시선을 거뒀다.
창문을 봤다. 밖. 아무것도 안 보였다. 유리만 보였다.
“…”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의 손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하린 씨.”
“네.”
“괜찮아요?”
하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3초. 5초.
“괜찮아요.”
주먹을 폈다. 손가락을 폈다. 하나씩.
“그냥요.”
“응.”
“보니까요.”
하린이 정민을 봤다. 눈이 젖어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진짜네요.”
“뭐가요?”
“망했다는 거요.”
웃었다. 웃음 같지 않았다. 소리만 났다.
“숫자로 보니까. 진짜네요.”
“…”
“3년 있었는데. 8분이래요.”
정민은 화면을 봤다.
빨간 점.
저게 도시였다. 아픈 곳. 피가 안 도는 곳.
“도시의 혈압이죠.”
정민이 말했다.
하린이 정민을 봤다.
“혈압이요?”
“응.”
정민이 화면을 가리켰다. 색깔들을.
“초록은 건강한 거예요. 노랑은 주의. 빨강은--”
“아픈 거요.”
“응.”
하린이 화면을 봤다.
빨간 점. 노란 점. 초록 점.
“고칠 수 있어요?”
“모르겠어요.”
정민이 말했다.
“근데요.”
“응.”
“보여야 고치죠.”
하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빨간 점을.
지안이 키보드를 쳤다.
“데이터 저장할게요.”
딸깍딸깍.
“매주 업데이트할 거예요. 월요일마다.”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욱 씨한테 보여줘야겠네요.”
“왜요?”
“숫자 보여달라고 했잖아요. 지난번에.”
지안이 웃었다.
“이제 있네요. 숫자.”
저녁.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요일. 7시.
열다섯 명. 지난주보다 두 명 늘었다.
의자에 앉았다. 웅성거렸다.
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하린에게.
“하린 씨, 오늘 뭐 해요?”
“데이터요.”
하린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저거 보여드릴 거예요.”
사람들이 모니터를 봤다. 지도. 색깔.
“뭐예요 저거?”
“우리 동네요.”
정민이 앞으로 갔다. 모니터 옆에 섰다.
“마나밸리 지도예요.”
화면을 터치했다. 확대됐다.
“여기가 수연 씨 가게예요.”
점을 눌렀다. 초록색.
창이 떴다.
‘유동인구: 일평균 312명’
‘체류시간: 34분’‘재방문율: 52%’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저게 우리 가게요?”
“네.”
“52%요? 그게 뭐예요?”
“재방문율이요. 100명 오면 52명이 다시 온다는 거예요.”
수연이 화면을 봤다. 입이 벌어졌다.
“단골이 반이에요?”
“반 넘어요.”
수연이 옆 사람을 봤다. 노인. 옆 사람도 웃었다.
“대단하네.”
동욱이 손을 들었다.
“저기요.”
정민이 봤다.
“빨간 거요. 저거 어디예요?”
정민이 화면을 터치했다. 빨간 점.
창이 떴다.
‘공실률: 40%’‘유동인구: 일평균 89명’
동욱이 화면을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
“저기 내 건물 있는데.”
“네.”
“공실 40%요?”
“네.”
동욱이 팔짱을 꼈다. 입술이 일자가 됐다.
“그래서요?”
“보여드리는 거예요.”
정민이 말했다.
“뭐가 문제인지.”
동욱이 입을 다물었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빨간 점.
노인이 손을 들었다. 부채 든.
“저기요.”
정민이 봤다.
“저건 뭐요? 저 숫자.”
화면 구석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체류시간: 8분’
“머무는 시간이에요.”
“8분이요?”
“네. 지나가기만 한다는 뜻이에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그래서 장사가 안 되는 거구먼.”
“그런 것 같아요.”
노인이 화면을 봤다.
“이거 고치면 장사 되겠소?”
정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해봐야 알죠.”
회의가 끝났다.
아홉 시.
사람들이 나갔다.
수연이 문 앞에서 멈췄다.
“정민 씨.”
“네.”
“저거요. QR.”
“네.”
“찍으면 어떻게 돼요?”
“기록돼요. 누가 왔는지. 언제 왔는지.”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스티커. QR 코드. 아까 붙인 것과 같은.
“이거 더 줘요. 테이블마다 붙일게요.”
정민이 수연을 봤다.
수연이 웃었다. 주름이 잡혔다.
“단골이 52%래잖아요. 더 늘리고 싶어요.”
스티커를 들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삐걱.
정민과 하린만 남았다.
하린이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지도. 빨간 점.
정민이 다가갔다.
옆에 섰다.
“하린 씨.”
“네.”
“아까요.”
“응.”
“괜찮아요?”
하린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진짜요?”
하린이 정민을 봤다.
“진짜요.”
“…”
“그냥요.”
하린이 화면을 가리켰다. 빨간 점.
“저기 제가 있었어요.”
“응.”
“3년 동안.”
“응.”
“근데 8분이래요.”
하린이 웃었다. 웃음 같지 않았다.
“3년 있었는데. 8분.”
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린이 노트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서. 낡은 것.
펼쳤다.
오늘 적은 것.
‘11/15. 수연네 빵집. 손님 47명. 단골 12명.’
펜을 들었다. 파란 펜.
적었다.
‘아카데미 참석자 15명. +2명.’
적고 나서 봤다.
“이건 남아요.”
정민이 노트를 봤다.
“뭐가요?”
“손글씨요.”
하린이 노트를 닫았다.
“QR은 숫자예요. 근데 이건 사람이에요.”
“…”
“12명이 단골이에요. 그게 중요해요.”
하린이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저는 그걸 세는 거예요.”
정민이 하린을 봤다.
하린이 가방을 메었다.
“들어갈게요.”
“응.”
“내일 봐요.”
나갔다.
문이 닫혔다. 삐걱.
정민은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모니터가 켜져 있었다. 지도.
빨간 점이 떠 있었다.
정민이 화면을 터치했다.
빨간 점. 프래그먼트가 있던 곳.
창이 떴다.
‘체류시간: 8분’
정민은 화면을 봤다.
8분.
하린이 3년 동안 커피를 내린 곳.
단골들이 왔던 곳.
정민이 처음 하린을 만난 곳.
8분.
정민이 화면을 껐다.
검은 화면.
창문을 봤다.
밖이 어두웠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주황색 불빛.
테이블 위에 뭔가 있었다.
QR 스티커. 한 장. 떨어져 있었다. 하린이 놓고 간 건가.
정민이 집었다.
네모났다. 흰 바탕. 검은 코드.
손가락으로 만졌다.
매끄러웠다.
주머니에 넣었다.
장판 조각 옆에.
문을 잠그고 나왔다.
철문이 삐걱거렸다.
골목을 걸었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있었다. 하나씩.
수연네 빵집 앞을 지나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문에 뭔가 붙어 있었다.
QR 스티커.
정민이 멈췄다.
스티커를 봤다. 계산대 옆에도. 문 옆에도. 이제 유리문에도.
찍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있었으면.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발소리가 났다.
딱. 딱. 딱.
멀리서 소리가 났다.
삑.
QR 찍는 소리.
누군가 찍었다.
-계속-
"3년 있었는데. 8분이래요."
"QR은 숫자예요. 근데 이건 사람이에요."
본 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두 가지 버전을 준비 중입니다.
중편 시나리오 (1부 단독) 48신 구성. 중편은 나름 퇴고를 했습니다.
상생협약의 실패와 프래그먼트의 폐업을 다룹니다.
하림지구의 상실, 정민의 내면 변화, 하린과의 이별까지. 단독 완결 구조입니다.
이 작품은 시스템의 폭력을 다룹니다. 기록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게 된 것들. 그 상실에 대하여.
장편 시나리오 (1부+2부+3부)는 현재 열심히 집필중입니다.
중편과 장편은 결이 좀 다릅니다.
중편은 상실의 서사입니다.
장편은 상실에서 대안까지 가는 서사입니다.
본 소설 연재가 완료되면 중편 시나리오 부터 연재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사유를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