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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고 깨지기 쉽지만, 그럼에도 방패입니다

서평

by 이재 다시 원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만, 그럼에도 방패입니다 — 김중혁 『유리 방패』


수없이 무거운 일들에 지쳐 있을 때는, 한없이 가벼운 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김중혁의 단편소설 ‘유리 방패’는 한 편의 농담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청년 실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장난과 진지한 유머를 넘나든다. 현실에 대해 슬퍼하고 주저앉으며 비판하는 게 아닌 주인공들의 실패를 장난스러운 예술로 감싸 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소설은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상상력 부족을 교묘하게 조롱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특유의 유머와 엉뚱함으로 자신들의 실패를 재해석한다. 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방향과 의미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끝내 자신들이 만들어낸 의미가 유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소설 ‘유리 방패’는 단순히 서사적인 성취를 넘어 청춘의 말랑한 저항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실험적인 소설이라 평할 수 있겠다.


소설은 나와 M, 통칭 우리가 ‘실을 푸는 행위’로 시작된다. 초반에 일어나는 실뭉치를 푸는 사건은 이 소설 전체를 이끄는 핵심적인 상징이자 메타포로 작용한다. 나와 M은 서른 번의 회사 면접을 모두 함께 봤고, 전부 실패했다. 이번 서른 번째 면접의 퍼포먼스였던 실뭉치 풀기에 실패한 나와 M은, 지하철 끝 칸에서 그 퍼포먼스를 다시 자발적으로 수행한다. 이는 단순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패한 퍼포먼스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실패를 다시 마주하려는 것과 같다. 실패에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주인공들은 실을 풀며 자신들의 삶과 사회와의 얽힘을 풀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실뭉치 풀기에 성공한 나와 M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게 뭐야. 너무 쉽잖아. 아까는 왜 이렇게 안 됐을까?”

“우리가 그렇지 뭐. 중요한 순간에 모든 걸 망치는 게 우리 특기잖아.”


모든 걸 장난스럽게 넘기려는 듯한 나와 M에게 은은한 패배주의적 사고가 묻어난다. 소설에서는 이런 패배주의적 사고에 순응하거나 이겨내라고 등을 떠밀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보여줄 뿐이다.


실뭉치를 모두 푼 뒤, 실의 길이를 재기 위해 M은 실의 끝자락을 들고 지하철의 끝부터 끝까지 이동한다. 여기서 열심히 푼 실은, 신고를 받고 도착한 역무원에 의해 다시 실뭉치로 돌아온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그것이 의미를 내더라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관성. 이러한 되돌아옴은 주인공들이 의미를 찾고 다시 그것을 잃게 되는 소설 후반부에서도 계속해서 보이는 모습이다.


실패와 시도, 그로 인한 지침과 무기력한 감정들. 마치 실을 풀다가 다시 엉키는 반복처럼,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결국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 나 또한 20대의 청춘을 살아가며 그런 관성을 여러 번 느껴본 적이 있다.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막막한 감정이, 걷거나 뛰어도 진척되지 않는 듯한 일상이 답답하고 불안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나와 M이 실을 풀며 시작하는 과정은, 그리고 그 실이 다시 뭉쳐지는 과정은 내가 그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도 결국 실패를 반복하고 관성처럼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의 비극. 하지만 소설은 그 지점을 비극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관성마저 유쾌하고 의미 있게 포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이 내가 이 소설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위로였다.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주인공들이 실뭉치를 풀고 그것의 길이를 재기 위해 지하철 칸을 넘나든 이후이다. 그들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며 인물들은 유명세를 띄게 되고, 그들의 실패한 행위는 타인들로 인해 예술로서 해석되기 시작한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그들이 인터뷰를 하기 전에 구매한 플라스틱 칼과 유리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방패라는 장난감 소품이다. 나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유리 방패’가 청춘의 자화상이라 본다. 투명하고, 취약하며, 깨지기 쉬운 방패. 유리 방패는 소설 속에서 상상력 없는 사회에 맞서는 인물들의 무기이자 방어구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하는 상징적 물건이기도 하다. 나는 방패이되 방패답지 않은 이 유리 방패가 현실의 청년들이 지닌 불완전한 보호막을 은유한다고 느꼈다.


20대의 청춘은 부모의 품을 떠나고 보호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놓이게 된다. 나는 지금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학교와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 인간관계 속에서 때로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로 흔들리고 무언가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 방패는 지금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쉽게 깨지고, 닦아내지 않으면 투명하지 않게 흐려지고, 그저 앞을 볼 수 있을 뿐 막아낼 순 없는 무언가. 하지만 동시에 이 유리 방패가 홀로서는 첫걸음에 필요한 연습장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불완전하기에 더 조심스럽고 투명하기에 현실을 더욱 정직하게 마주하게 되는. 비록 방황과 두려움이 따를지언정, 그 모든 것이 어른이 되는 데 필요한 통과 의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속 ‘우리’가 그런 방패를 들고 우스꽝스럽게 장난을 치는 장면은 애달프면서도 작은 웃음을 자아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청춘들 또한 그런 애처로운 방패를 하나쯤 들고 무장 아닌 무장을 한 채 날마다 버티고 있으니까.


이후 퍼포먼스를 계기로 유명해진 나와 M은 면접관이 되어 오히려 타인을 시험하는 처지가 된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을 시험한 면접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폭죽을 터트려 지원자들의 긴장도를 시험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지원자에게는 높은 점수를 준다. 그들은 이제 타인의 실패와 긴장에 공감하는 자로 변모한다. 이 변화는 실패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실패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게 만드는 통로일 수 있다.


하지만 나와 M의 작은 반란은, 딱딱한 사회 앞에서는 너무나 말랑했다. 사회는 이들을 재미있게 바라보지만, 딱 그뿐이다. 주인공들이 단독으로 면접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매번 수많은 다른 정통 면접관 사이에서 함께한다. 결국, 이 소설은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내면의 흐름을 잠시 들여다본 후 그 흐름을 흩어지게 내버려 두는 방식이다. 이는 작가가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이자 독자에게 생각할 틈을 남겨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결말은 무언가를 완전히 정리하거나 정의하지 않고 여운으로 남기는 것. 그것이 삶이고, 청춘이라 말해주는 듯하다.


소설 ‘유리 방패’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청춘 서사와는 결이 다르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꿈을 이루거나 세상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실을 푸는 것으로, 지하철에서 장난을 치는 것으로, 면접장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견뎌낸다. 처음의 실 풀기 퍼포먼스로 인한 인터뷰에서 나와 M은 왜 하필 실을 이용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워낙 실패를 자주 하다 보니 거기서 실이 풀려나온 것 같다.’ 사회의 청춘, 청년들은 모두 이러한 실패를 겪으며 각자 거기서 풀려난 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얽혀버린 실뭉치는 확 잘라버리고 싶기도, 모두 풀어내고 싶기도 한 무언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실은 실뭉치로 돌아가고 만다. 이처럼 청춘들의 삶과 그들이 삶에 타협하는 방식을 우리는 소설의 장난 같은 진지함으로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다.


소설은 실패중독자가 된 현실의 청춘들에게 묻는다. 실패를 얼마나 유쾌하게 감싸 안을 수 있냐고. 그 유쾌함이 주는 힘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의 태도가 다른 이의 방패가 될 수 있다고. 그 방패가 비록 플라스틱일지라도, 깨지기 쉬운 유리일지라도, 없는 것보다 나은 유리 방패를 들고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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