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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노래를 틀었을 때, 그때의 향수가 뿜어져 나온 적이 말이다.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는 노래. 내게 이설아의 '있지'는 그런 노래였다.


'있지'를 막 들었을 때, 나는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특히 가사에 신경을 쓰는 편인데, 그때 '있지'의 가사가 내 마음을 관통했다.


있지. 그대 인해 나의 슬픔은 도망갔지만.
그댄, 나의 가장 큰 슬픔이 되었어요.


'있지'의 첫 부분 가사이다. 나는 당시 사랑하던 대상(K 씨라고 지칭하겠다.)을 통해 여러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고 있었다. K 씨를 만나고, 내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 바람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도, 내 걱정도, 슬픔까지도 모두 잊게 되었다. 나의 슬픔이 K 씨로 인해 도망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내 마음속에는 K 씨의 비중이 커졌고, 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나는 K 씨의 시선이 나에게 닿으면 행복해했고, 그 시선이 거둬지면 슬퍼했다. K 씨가 다른 여자와 말을 섞은 사소한 일에도 세상 구슬프게 울어보기도 했다. 결국, K 씨는 나의 가장 큰 슬픔이 된 것이다.


이처럼 노래 가사는 분석하고 곱씹을수록 떠오르는 경험과 그에 따른 느낌이 달라지고, 이는 개인별로 다르다. 여기에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원래 시와 노래는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언어와 음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는 데에서 시작된 시가는 시와 노래로 나뉘었다. '시가'라는 한 뿌리에서 '시'와 '노래'라는 두 개의 가지가 자라난 셈이다.


시는 문장으로 감정을 담아내고, 노래는 거기에 소리-리듬-멜로디를 얹은 형태이다. 둘은 서로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며 발달해왔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났기에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바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가장 깊고 넓게, 동시에 가장 섬세하게 전달하는 방식이 바로 '함축'이다. 함축의 특징을 잠시 살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윤동주, 서시"


이 두 줄만으로 어떤 사람은 죽은 친구를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슬픔을 떠올린다. 이게 가능한 게 함축성 때문이다. 함축은 자기만의 경험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있지'의 노래 가사를 내 개인적인 경험을 투영하며 이해하고 분석해 뜯어보도록 하겠다.


"있지.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먼저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어요."


K 씨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서로가 죽었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K 씨는 내 장례를 3일간 앞장서서 치를 것이라 했다. 울지 않고 꿋꿋이 버티다가,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을 때.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고 쏟아내다 결국 무너져버릴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이런 생각을 했다. 그에게 그런 현실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나라면 버티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K 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K 씨보다 먼저 죽고 싶다. K 씨가 없는 세상에서의 슬픔을 겪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 가사는 그런 마음을 담은 게 아닐까.


"더 궁금할 게 없는 세상에서 그댈 보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생겼을까."


K 씨를 만나기 전에 내 삶은 암흑기였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쌓여 무관심이 된 시기. 그때 K 씨를 만나면서 세상에 관심이 생기고, 생기를 되찾기도 했다. 결국 K 씨를 향한, 사랑에 의한 궁금증이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낸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탐구하며 목표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가사는 그런 의미에서 대상으로 인해 삶을 다시 살아간 게 아닐까. 그렇게 여기니 후에 나오는 '고마워'라는 가사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타나줘서 고마워. 사랑해의 대답은. 사랑해."


철학자 스피노자는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해석하면, 사랑은 기쁜 감정이고, 그 기쁨은 그냥 기쁜 게 아닌 그 사람이라는 원인이 있기에 생긴 기쁨이며,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있지'라는 노래를 통해 나는 생각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라고.



우리는 종종 사랑을 감정의 롤러코스터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기쁨과 설렘이 있는가 하면, 아픔과 슬픔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작은 무관심에도 마음이 얼어붙는다. 사랑은 아프고, 시리고,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나 아닌 누군가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 행위는 아슬아슬하지만, 동시에 경이롭다. 사랑이 아름다운 건, 그 모든 감정의 진폭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삶을 향한 가장 근본적인 응답이자, 타인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몸짓이다.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안에 타인을 위해 마음을 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야 인간이 그렇게 한가한 동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라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오른쪽이, '기생수'"


나는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용기라고 본다.


사랑이 반드시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경험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이기에,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상대는 그 사실만으로 감사의 이유가 된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로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세상에는 마을을 열어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외로움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도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누군가를 떠올리며 마음이 흔들리고, 그 사람 덕분에 아침이 조금은 따뜻하게 시작된다면, 그것은 이미 삶이 내게 내린 은밀한 축복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군가에게 향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삶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사진 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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