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간은 고통을 겪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면, 반드시 그 고통을 주는 이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상처를 주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김애란 작가의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그런 물음을 품은 채로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고립과 침묵 속의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작품은 단순한 청춘의 이야기처럼 시작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실상은 안에 담긴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이 무겁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중에서 주인공 서미영의 감정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타인의 기대에 짓눌리고,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숨기는 선택을 하는 모습들이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개인의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상처의 본질 자체를 파고든다. 결국, 누구나 살아가며 한 번쯤 마주하는 고통의 실체를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서미영의 내면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여러 인물과의 관계적 얽힘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를 붙잡는다. 선배와의 재회가 그 시작점이었다. 선배는 오랜만에 만난 미영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부탁받은 날짜가 어릴 적 친구인 병만의 장례식 날이었다. 여기서 선배의 말투나 손짓, 시선 같은 것들은 한때 그녀에게 위로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말들은 점차 억압의 기호로 다가온다. 대학생 시절 선배가 쓴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라는 말에서 미영은 세심한 다정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후에 재회한 선배가 다시 쓴 그 문장은, 선배가 살기 위해 미영에게 자신과 같은 굴복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달라진다. 그 문장의 전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감정의 이중성과 관계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거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에서 초반의 선배는 미영을 챙길 여유가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반의 선배는 그 여유조차 상실한 모습이다. 이 모습은 관계의 온도가 개인의 성격이 아닌 시대와 환경에 휘둘러지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외면하고 상처입히며 살아간다. 이 소설은 그런 현실을 차갑고 서늘하게 직면하도록 만든다.
선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미영은 장례식에 가기 전, 방송 촬영에 참여한다. 이때 방송의 내용은 예쁘고 날씬한 푸드파이터 달인으로, 미영은 달인을 빛내기 위한 일반인 참가자 역할이었다. 방송 촬영 장면은 서미영이라는 인물의 자의식과 사회적 시선 사이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뚱뚱한 일반인 먹보라는 역할을 떠맡은 미영은 의도치 않게 타인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몸에 맞지 않고 꽉 끼는 레슬링복까지 입은 채로 사람들 앞에 서야 했다. 이런 미영의 모습은 그 모습 자체로 부조리한 사회적 요구를 상징한다. 서미영은 그 순간 타인의 기대에 응답하며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온몸으로 받았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경쟁과 비교의 현실인 것이다.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맞추려 애쓰는 일상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고 만다. 나 또한 사회 속에서 ‘무언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나 자신을 몰아붙였던 적이 있다. 그럴수록 타인의 시선에 더욱 민감해져 그 시선이 날카롭게 느껴졌고, 존재 자체가 평가되는 듯 항상 불안했다. 이 작품은 그런 감정에 휩싸인 미영에게 더 큰 고난을 준다. 그 고난은 바로 선배가 쓴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라는 팻말이다. 선배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격을 먹은 미영에게 고개 좀 들라며 굴복을 강요한다. 그 문장이 미영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고 있었는지 알던 독자로서, 선배가 남긴 위로의 문장이 전복되는 과정은 통탄스럽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얼마나 잔인한가. 그리고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는 과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서미영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통과하는 삶의 일부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미영은 병만과의 추억, 그리고 선배의 부탁을 떠올린다. 어릴 적 물속에 빠진 미영은 살고 싶다고 속으로 외치며 살기 위해 병만의 팔을 잡았다. 여기서 미영의 ‘살고 싶다’라는 외침은 단순한 생존의 욕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고독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때 잡은 동아줄 같은 병만의 팔뚝을, 미영은 물리적으로 상처를 주면서까지 붙잡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붙잡은 병만의 팔뚝처럼, 선배가 부탁하며 붙잡은 미영의 팔뚝에 멍이 들었음을 알게 된다. 미영은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 ‘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이처럼 서로 손을 붙잡는 행위는 보호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를 상처입히는 행위로 변질되는데, 이 모순적인 상호작용이 관계가 지닌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성이 가진 아이러니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되묻는 동시에 상처란 것이 어떻게 반복되고 전이되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고통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대와 침묵, 혹은 관심과 무관심 속에서 증식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짊어지는 건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이다. 김애란은 이 복잡한 감정의 대물림을 서미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세밀하게 펼쳐 보인다.
이렇듯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는 결정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 경험 속에서 미영은 고립감과 무력감, 타인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로서의 괴로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 또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작품의 주요 메시지를 끌어낸다고 본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때론 누군가를 짓밟고, 때론 짓밟힌 채 살아간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인간이 가진 변화의 가능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필연적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서로를 위로하려고 애를 쓰는가. 김애란 작가의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그 물음에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작은 제스처를 통해 상처와 회복 사이에 놓인 인간의 본능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밀쳐내야 했던 경험, 혹은 밀쳐지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고 한다. 미영을 잡아준 병만처럼, 선배를 잡아준 미영처럼 말이다. 상처를 입히는 자와 받는 자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기에, 이 소설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불완전함을 전제로 한다.
나는 그 깨달음이야말로 이 작품이 품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한 가능성이라고 본다. 인간은 완벽할 수가 없다. 다만, 앎을 통해 나아갈 수는 있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남긴 상처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저 아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알아챔을 딛고 나아가려는 의지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느꼈다. 자책에 머무르지 말자고, 알게 되었기에 변화할 수 있다고 말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단순한 성장 소설이 아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조금 덜 아프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가. 소설은 그러한 질문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어쩌면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지닌 가능성이며, 상처 많은 이 세계에서 끝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 소설은 여름의 끝에서 던지는 질문처럼 오래도록 우리 마음에 남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