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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착한 아이였다.

언제나 부모님이 기대하는 답을 골라 말하고, 아버지의 눈빛을 읽었으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런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 웃고, 잘 맞춰주는’ 아이로 자리 잡았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모두 조심스럽게 포장해둔 채로 말이다.


어릴 적의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는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크던 아이는, 하나의 가면을 짜냈다. 융이 말한, 타인 앞에 세우는 사회적 얼굴인 페르조나였다.



페르조나는 인간 존재에 필수적인 장치다. 우리는 누구나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가면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사회 속에서 살아남게 하고, 때로는 나를 지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가면이 나를 가두기 시작할 때 찾아온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가면 속의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갔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하는 척 답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설명하지 못할 공허함을 기르고 있었다. 나 자신조차 내가 진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렇게 내가 억누르고 길러왔던 건, 깊고 눅진한 ‘분노’였다.


예컨대 동생은 어리니까 맛있는 걸 양보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춰야 했다. 억울하고 서운해도 착한 아이로 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타일러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분노와 감정들을 부끄럽게 여기며 숨기기 급급해졌다. 나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은 하나둘 마음속 깊은 심연의 파도 안으로 밀려 나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뒤틀리고 썩어버린 것들은 한데 뭉쳐 더욱 짙은 냄새를 내뿜었고, 무의식의 뒷골목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융은 이를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림자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중요한 나의 일부이다. 그런 내 그림자 속에는 분노와 질투만이 있던 게 아니었다. 억눌린 창의성, 용기, 살아 숨 쉬는 생명력 같은 것들이 함께 숨어 있던 것이다. 나는 착한 아이로 남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함께 질식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에 사로잡혔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웠고, 기대에 맞춰 살아가는 일도 점점 무너지듯 괴로워졌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나는 우울증과 마주했다.


스무 살 초반의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는 것도, 나를 찾지 못해 허덕이는 것도 모두 지겹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며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래, 마치 살아 있는 껍데기처럼.


그때 글을 만났다. 글은, 내게 처음으로 허락된 자유였다. 누구의 시선도, 기대에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자유 말이다. 나는 글 속에서 비로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를 옥죄던 건 세상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었음을 말이다. 그 깨달음에서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을 찾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우울증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치료와 함께 나를 찾는 여정은, 단순히 가면을 벗어던지는 일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융이 말한 것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해, 진정한 자기로 나아가는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그 여정이 너무 두려웠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은 너무 길었고, 그동안 내가 배운 거라곤 오직 내 그림자를 외면하는 법뿐이었으니까.


나는 내 안에 ‘바보상자’를 만들어줬었다. 질투, 분노, 서운함 같은 감정들을 상자에 담아 잠갔고, 그 상자를 머릿속 호수의 밑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감정을 봉인하고 나면 나는 다시 바보처럼 웃을 수 있었다. 봉인한다고 새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와 함께 나를 찾는 과정을 통해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노를 느끼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질투를 느끼는 것도 미성숙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당연한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병들게 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림자는 나의 적이 아니었다. 내 안에 숨어 살던 ‘나’였다. 그런 그림자를 인정하고 껴안은 순간, 나는 비로소 진짜 나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화를 내는 것도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고, 질투를 느끼는 것도 스스로를 믿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가슴이 밉고 아리게 아프던 나를 다독여줄 존재는, 세상 누구도 아닌 나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이제 착한 아이의 가면만을 쓰고 살지 않으려고 한다. 내 안의 빛과 어둠을 전부 껴안고 살고 싶다. 그 모든 게 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인지하기 위해 나 스스로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정말 이걸 원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야?”


나에게 묻고 답하는 그 질문들 사이를 오가며, 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물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시 가면을 쓰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진짜 나는 착한 아이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 나는 그보다 더 깊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니까 말이다.


어릴 적의 나는 사랑받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었다. 이제는 사랑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껴안고 살아가고 싶다. 가면을 벗고 그림자를 껴안고 진짜 나로 살아갈 용기를, 나는 차근히, 아주 천천히 배우고 있다. 그리고 믿는다. 그 길 끝에서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가 오면 어린 시절의 나를 가만히 끌어안고 이 세상 가장 따뜻한 온기로 안아주고 싶다.

오늘도 그 믿음 하나로 나는 숨을 쉬고 걷는다.

조금씩, 조금씩

가면 너머의 나를 찾아


나아간다.


(사진 출처: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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