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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Oct 19. 2023

#5. 터져버린 고름 (2)

한 명 빼고 모두 울어 버린 날

아빠와 동생이 있는 방향으로 남편이 뛰어가자마자 엄마는 내게 소리치며 말했다.



"너는 내가 OO(남편 이름)이한테 뭐만 하면 왜 난리니!"



화가 나 가버린 아빠를 달래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엄마까지 대뜸 내게 화를 내니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OO이가 가서 아빠랑 이야기하면 아빠가 좀 더 빨리 화가 풀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건데."



그러면서 덧붙이길,



"그리고 엊그제는 뭐? 찡찡대?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니?"



이게 뭔 소리인고 하니, 엊그제 긴 이동 끝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숙소 앞 마트에서 사 온 쌀과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으로 차린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이동하느라 피곤하기도 했고, 중간중간 아빠의 작은 불평에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기내식으로 다들 소화가 안 되었는데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선언한 엄마가 기내식 대부분을 스킵하는 탓에 배고프다고 해 쉬지도 못하고 장을 봐 밥을 차려 짜증이 나있었다. '나는 피곤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밥을 다 먹은 후 미세하게 토라진 내 기분을 알아 차린 것인지, 아님 진심으로 나를 생각한 것인지 동생은 "누나가 고생 많았네, 다들 찡찡대는데 받아주고."하고 말했다.



동생이 알아준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또 동생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에 신이 나 이때다 싶었는지 나는 24시간 동안 모아 왔던 짜증을 살짝 풀어내버리고 말았다. "그러게, 왜 이렇게 다들 찡찡대는 거니."



이때 했던 말을 엄마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는 별말 없더니 이제 와서, 가족 유럽여행 위기의 순간에 엄마는 내게 서운하다는 듯, 그리고 화가 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엄마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을 몰라 놀라기도 했지만 나 역시도 그 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터라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차분히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순간에 엄마가 내 뇌관을 눌러 버렸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지, 너만 생각하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엄마의 말이 몇 개 있는데, 이를 테면 "너는 이기적이야."라던가 "너는 못됐어." 등이다. 뭐, 누구한테 들어도 싫은 말이지만, 엄마한테 듣는 게 나는 무척이나 싫다.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도 ‘네가 뭘 알아’, ‘내가 실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면 됐지.’ 하고 무시할 수 있는데,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내 정체성이 정말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거 같았다.



엄마, 아빠랑 통화하다가 목소리가 울적한 것 같다고 느끼면 무슨 일인지 잠 못 이루고 바로 본가로 내려가 기분을 풀어주고 와야 하는 나였다. 백수라 내가 돈은 제일 적게 냈지만 그래도 긴 시간을 할애하며 어딜 가면 다들 기뻐할지 찾아보고 계획했었다. 이런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듯 나를 한 순간에 불효녀로 만들어 버리는 엄마의 말은 나를 매번 화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몇 번을 신신당부했는데도 엄마는 화가 나거나 나와 다툴 때면 거의 한 번도 빠짐없이 이 말을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기서 나도 엄마랑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빠부터 달래주는 게 우선이었다. 남편도 데리고 온 여행이었다. 남편 앞에서 엄마와 싸우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래, 엄마, 내가 나쁜 년이야. 내가 죽일 년이야. 엄마 딸이 이런 년이라 참 좋겠다."



처음 보는 유형의 반응에 놀란 것인지, 내 눈에 맺힌 눈물 때문인 건지, 엄마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알겠어, 알겠어, 그만하자."










한 이름 모를 광장 안 벤치에 아빠와 동생이 앉아 있었다. 아빠 옆에 앉은 동생은 무언가 열정적으로 해명하듯 말하고 있었고, 아빠는 그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동생이 연설 막바지 중이었다.



나는 아빠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서있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울기 시작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아빠 눈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동생과 내가 다퉈 아빠에게 혼날 때면 울음이 많은 동생은 울었다는 이유로 꼭 나보다 더 혼나곤 했다. 울음에는 인색한 아빠가 운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놀랐고, 반사적으로 나도 눈물이 났다. 아빠 얼굴을 껴안고 울지 말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



지금 생각하니 뭐 울기까지 하나 싶은데, 그때 당시 나는 아빠가 울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 장소와 시점이 우리 가족이 여행을 나와서라는 게 슬펐다. 재밌게 추억 쌓고 놀다 오자고 꼬셨던 게 내가 아닌가.



울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금방 진정한 나는 아빠와 둘이서 주변을 산책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아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이 한 마디를 통해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동생은 엄마 편만 든다."



어디서 말하기 참 창피하고 유치하지만, 실제 아빠가 했던 말이다. 기념품 샵에서 아빠가 사고 싶었던 대왕 맥주잔 사는 것을 엄마가 반대했고, 원하는 반응을 듣고 싶어 동생한테 다시 의견을 물었을 때 엄마와 똑같이 말하는 동생에게 아빠는 서운함을 느꼈던 것이다. (ㅋㅋㅎㅎ)



감정을 추슬렀지만 돌아오는 택시 안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숙소에 도착해 곧장 방 안 침대로 가 누운 아빠에게 나는 좀 쉬시고 괜찮아지면 밥을 먹자고 했다. 그러자 아빠는 말했다. "지금 한국 가는 비행기 예약하긴 어렵겠지?"



'참 이럴 땐 어린애 같으시네.' 나는 아빠 방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동생도 방으로 들어갔고 엄마는 아빠와 같이 있기가 불편한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직 해도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 방안에 틀어 박혀 있자니 시간이 아깝고 또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우리 둘은 잠깐 밖에 나갔다 오기로 했다.



숨 막혔던 분위기의 숙소에서 나오니 긴장이 풀렸는지 배가 고팠다. 숙소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슈니첼과 굴라쉬를 주문했다. 아직 몇 끼 먹지 않았지만 부다페스트에서 먹은 음식들 중 가장 맛있었다. 하필 이럴 때 둘만 온 곳이 맛집이라니, 참.



"△△△(동생 이름.) 얄미워 죽겠어.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반성하는 기색도 없고 말이야."



음식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본격적으로 동생 험담을 시작했다. 뭐 그렇게 동생이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동생 때문에 아빠가 서운했던 것도 맞고, 시장에서 했던 동생의 막말 '역대급 시간 낭비'로 나도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마. △△도 지금 엄청 속상할 거야. 그리고 OO(내 이름)가 아버님이랑 한 바퀴 걸으러 갔을 때, △△ 울었어."



동생이 울었다니, 상상도 못 했다. 내 놀란 표정을 보곤 남편이 덧붙였다.



"△△가 우니까 어머님도 우셨고."



여행 와서 온 가족이 울었다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문뜩 생각이 들어 남편을 보며 말했다.



"오빠만 안 울었네?"



그러나 오빠는 약간은 개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네, 나만 안 울었네."










K장녀의 (동)유럽 가족여행 셋째 날 코스



중앙시장




부다페스트 지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이다. 프랑스 건축가이자 파리의 에펠탑을 설계한 에펠탑이 설계하고 건축하였다. 1층은 육류, 과일, 와인 등의 식료품들이 있으며, 2층에는 헝가리 전통 의상 및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Vigadó Étterem és Söröző




다른 가족들은 숙소에서 머리 싸매고 누워 있을 때 나와 남편만 둘이 갔던 숙소 아래 식당. 안 그래도 맛있다는 평이 많아 가족들과 가려던 곳인데, 남편과 둘 뿐이었지만 정말 가기 잘했다 싶었던 곳. 음식이 하나 같이 너무 맛있었다.



Leo Rooftop Budapest


갈등을 얼기설기 봉합하고 나와 들렀던 루프탑 바. 세체니 다리와 다뉴브 강, 페스트 전경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라 예약을 하지 않아 바 자리에 앉았었는데, 풍경을 바라보며 즐길 수 없어 아쉬웠었다. 솜씨 좋은 바텐더가 칵테일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장소가 마음에 들었던 아빠는 일찍 와서 즐겼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말할 정도.



가족 유럽여행 꿀팁!


No. 3. 취향이 다른 가족들, 꼭 같이 다니기보단 여행 일정 중 일부는 따로 다녀 보는 건 어떨까요?

- 단체주의자 아빠를 닮은 건지, 장녀라 그런 건지, 아님 제 취향인 건지, 저는 항상 가족 여행은 다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요. 이렇게 일주일 이상 장기 여행 (맞죠?)을 가보니 다 같이 다닌다는 건 모두가 피곤할 뿐 누구도 즐겁지 않더라고요. 모두가 다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취향도, 식습관도, 여행 스타일도 모두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었었나봐요. 여행 가기 전 미리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따로, 또 같이를 여행의 슬로건으로 삼아 보시길. (저희 집은 쉽지 않았지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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