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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Oct 19. 2023

#4. 터져버린 고름 (1)

MBTI 극 F 가족의 이른 여행 결말

"나 먼저 집에 갈란다."



남편과 같이 집에 사갈 기념품을 결제하고 있던 나는 아빠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라 뒤를 쳐다봤지만 아빠는 이미 휙 하고 돌아 빠를 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아니, 영어도 잘 못하고 심지어 돈도 없는 아빠가 여기서 어딜 간단 말인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정황상 동생이 무언가 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 싶었다.



오늘 우리는 중앙시장에서 기념품을 사고 근처 그리스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구경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2대 3, 그러니까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실용파 엄마와 동생, 그리고 쇼핑을 좋아하는 쇼핑파 아빠, 나, 남편 이렇게 2대 3으로 나뉘어 시장 구경을 하게 되었다. 시장을 반 정도 돌았을까? 2층 식당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엄마와 동생을 발견했다.



나: "뭐 하고 있어, 여기서?"



동생: "우리 이미 한 바퀴 다 돌고 쉬고 있는 중이야."



구경을 마치고 쉬고 있었다는 동생의 말에 '도대체 뭘 구경하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착한 누나인 양 말했다.



"어제부터 다리도 아프다고 하던데 엄마랑 여기 앉아서 좀 쉬고 있어. 우리는 아직 못 본 데가 있어서 마저 구경하고 올게."



오늘 아침 동생이 병원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의 무게가 5kg가 넘는다는 말을 듣고 동생에 대한 연민, 그리고 누나가 되어 가지고 그간 힘든 동생의 처지를 몰라줬다는 죄책감이 들던 터였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뭐 하냐, 같이 가자."라고 했겠지만, 잘 참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툴툴댈 동생의 얼굴이 꼴 보기 싫기도 했다.



취향 맞는 셋이서 오손도손, 알콩달콩 쇼핑을 마치고 다시 식당가 구석 벤치로 돌아왔다. 걷지도 않고 좀 쉬었으니 동생 컨디션이 회복되어 기분도 좀 좋아졌으려나 기대했던 것도 잠시, 동생이 한 한마디 말에 나는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아, 역대급 시간 낭비였다."



'이거 나랑 싸우자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잘 봉인해 둔 나의 다혈질 본성이 튀어나오려는 찰나에 아빠가 말했다. "그럴 거면 집에 있어야지!"










시장 근처 그리스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우리는 살 게 있다며 상점 하나만 들리자는 나의 요청에 1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앞 기념품샵으로 들어갔다. 나와 남편은 집에 있는 선반에 올려둘 작은 모형을 고르고 있었는데, 국회의사당 모형을 살 것인지, 어부의 요새 모형을 살 것인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심하며 고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살짝 흥분한 듯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넨 이제 아무 소리 하지 말어!"



엄마한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좀 전에 쇼핑파 셋이서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아빠가 이번 여행에서 바라는 두 가지 소망을 이야기했는데, 한 가지는 엄마와 쇼핑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쓸모없더라도 손님들이 집에 왔을 때 눈에 띌 띌만한 크고 화려한 기념품을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헝가리 국기가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맥주잔이었다.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도, 맥주를 따라 마시기도 힘들 것 같던 맥주잔이었다.



엄마와 쇼핑하고 싶지 않다는 이 소망의 이유는 실용파인 엄마가 아빠가 무언가 살 때면 대부분 쓸데없다며 사지 말라고 한소리 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빠의 이런 소망을 사전에 들었던 탓에 아무 말 말라는 저 말이 엄마한테 하는 말임을,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 쇼핑하는 거 말리지 말라고 엄마한테 일러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아빠는 그 외 마디 말을 끝으로 상점을 나갔다. "나 먼저 집에 갈란다."



어부의 요새 모형 기념품 계산을 마치고 (그 와중에 계산은 했다.) 부리나케 상점을 나와 아빠를 쫓아가다가 앞서가던 동생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몰라."



동생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열불이 났다.



"내가 가봐?" 물으니 동생이 대답했다. "됐어, 내가 가볼게."



'저건 왜 나한테 짜증을 내?' 천불이 났다.



뒤에 걸어오고 있던 엄마와 남편에게 합류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동생은 저 멀리 가고 있는 아빠를 붙잡을 생각이 없는지 뛰어가기는커녕 아빠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기념품을 고르고 있을 당시, 아빠와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크고 쓸데없는 컵을 산다길래 말렸더니 저런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OO(남편 이름)아, 네가 가서 아빠 좀 말려 봐."



"오빠가 왜 가, 가려면 내가 가야지."



나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불편할 수 있는 처갓댁과의 해외여행인데, 처음 있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남편이었다. (우리도 처음이기는 했다.) 장인어른이 저렇게 화를 내고 가버린 상황에서 사위라고 뭘 할 수 있겠냐 싶기도 했고.



"그래도 사위가 가서 말리면 금방 풀릴 수도 있잖아." 엄마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어머니." 거듭 남편이 왜 가냐고 말하는 내 말을 끊고 남편은 아빠와 동생 쪽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남편이 뛰어가자마자 엄마는 갑자기 내게 소리를 질렀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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