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만 더 연장할게요."
민박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기로 했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지나 이틀을 더 연장했다. 곤란해하는 민박집 매니저의 표정을 보니 조만간 오갈 데 없이 길거리로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내 몸 하나 편히 누울 곳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우리는 길거리에 나앉을 수 있다는 불안감과 빠른 시일 내에 집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우리가 집을 구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1. 입주 시기: 최대한 빠르게 입주해야 한다. 캐나다에서의 첫 직업이 Homeless일 수는 없다.
2. 렌트비: 부담되지 않는 저렴한 금액.
3. 다운타운 내에 있을 것: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든다.
4. 학원과의 접근성: 학원은 가까울수록 좋다.
5. 깨끗할 것: 청소로 해결 가능한 정도의 더러움만 허용한다.
6. 하우스메이트: 없어도 상관없고, 있다면 여성만 OK.
7. 그 밖의 것: 이왕이면 넓은 공간에 동네는 안전했으면 좋겠다. 마트나 은행, 우체국 같은 편의시설이 가까운 곳이면 금상첨화. 그리고 (...)
지금 생각하니 가진 것도 없이 눈이 꽤 높았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이 기준들을 가지고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어학연수든 워킹 홀리데이이든 한국을 떠나 밴쿠버에 머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하나 있다. '우리들은 벤쿠버 유학생' 약칭 '우벤유'. 이름은 다소 유치한 감이 없지 않으나 유용하기로 따지면 1등이고 이유불문 꼭 가입해야 하는 사이트를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이곳이다. 나는 처음 밴쿠버에 도착해서부터 떠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반 까막눈에 귀도 어둡던 초반에는 우벤유에 의지를 많이 했는데 사소한 궁금증 해결부터 내 인생 최초의 중고거래까지 이곳을 통해 이루어졌다.
은행 계좌 개설 직후 ATM기기가 알 수 없는 명목으로 내 돈 1달러를 먹었을 때도 우벤유에 문의해서 그 답을 알 수 있었고, 이력서를 어디서 인쇄하면 좋을지 몰라 무작정 도와달라고 글을 써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잔고는 바닥을 보여가고 일은 안 구해져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조급해하지 말라며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여가 생활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중고거래로 사 한동안 신나게 탔고, 캐나다를 떠나기 전 불어난 짐을 정리할 때는 한국에서 사와 결국 포장도 뜯지 않은 돼지코, 귀이개, 스카치테이프를 묶어 1달러에 팔기도 했다. 바이블과도 같았던 워킹 홀리데이 안내 책도 5달러나 받고 팔았다. 우벤유 안에는 유학생과 워홀러에게 필요한 밴쿠버의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유용한 우벤유에서는 룸 렌트나 민박도 구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 올라오는 글을 읽고 마음에 드는 몇 곳을 골라 직접 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100곳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한계가 있어 고작 다섯 군데를 돌아보고 결정하게 됐다. 그중 우리가 처음 세운 기준에 아주 부적합한 곳을 제외하고 나니 두 곳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하나는 뭐든 적당했다. 오피스텔의 마스터룸이었는데 입주 시기도 적당했고 렌트비도 비싸지 않았다. 위치는 다운타운 내로 학원과는 걸어서 10분 정도. 깔끔 쾌적하고 다른 방에는 여자들만 살고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한 방에서 둘이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 아무래도 각자의 사생활이 보장되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다른 하나는 완벽했다. 비싼 렌트비만 빼고. 원룸 형태의 스튜디오였는데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고 주방 역시 나뉘어 있었다. 심지어 테라스도 있었다. 학원 바로 앞에 위치해 수업 5분 전에 나가도 지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학원 아래에는 큰 마트가 있었고 건너편에는 영화관과 카페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렌트비는 한 달에 1050불로 한국 돈으로 120만 원 넘는 금액이었다. 둘이 나눠 낸다 하더라도 매 달 60만 원을 지출해야 했다.
방을 고르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걸림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나와 언니의 집을 고르는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가장 1순위는 렌트비였다. 한 달을 간신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만 가지고 갔던 나는 언제 이 돈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일도 구하기 전인데 고정적으로 나가는 렌트비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상대적으로 금전적인 부담이 덜했던 언니는 렌트비가 조금 비싸더라도 우리 둘만 지낼 수 있고 다른 조건이 월등히 괜찮은 스튜디오에서 지내기를 원했다.
정 렌트비가 부담된다면 따로 나와 좀 더 저렴한 방을 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둘에서 혼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을 빨리 구하자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그렇다. 자기 합리화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같이 떠난 상황에서 각자 따로 지내게 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스튜디오를 택했다.
막상 이사하니 만족스러웠다. 몸 누일 곳이 있다는 게 가장 마음이 편했다. 또 한편으로는 언제 돈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 순간 걱정이 됐다. 비어 가는 내 통장 잔고처럼 내 마음도 텅 비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