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어딜 가든 한국인이 참 많다는 걸 느낀다. 중국인, 일본인도 많지만 한국인, 무지 많다.
밴쿠버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시차 적응차 하루를 꼬박 자고 일어나 '어디 한 번 밴쿠버 공기 좀 마셔볼까'하고 아침 일찍 뛰쳐나갔을 때도 거짓말 조금 보태 여기가 한국인지 캐나다인지 분간이 안되어 놀랐었다.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 드디어 캐나다네' 만끽한 것도 잠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귀에 착착 감기는 한국말. 나는 그때마다 함께 간 언니와 눈빛으로 말했다. '여기 캐나다 맞아?' ' 한국인 엄청 많아!'
한편으로는 안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으면 나 영어 공부 안 하는 거 아냐?' '한국인들하고만 다녀도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영어 공부 준비나 계획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캐나다에만 떨어뜨려놓으면 어찌어찌 영어는 자연스레 늘겠지라고 생각한 낙관주의자의 말로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는구나.' '망했다.'
약간의 충격을 뒤로하고 우리는 오늘 할 일을 하기로 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은행 계좌 개설도 해야 하고, 취업 카드도 발급받아야 하고, 어학원도 알아봐야 한다. 그뿐인가. 묵고 있는 민박집은 밴쿠버 다운타운의 시작점인데, 조그맣다고 유명한 밴쿠버 다운타운을 한 바퀴 돌아봐야지. 구글맵으로 미리 살펴본 바로는 자로 잰 듯이 반듯반듯한 길들을 하나씩만 따라 걸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길마다 특색 있다고 하니 꼼꼼히 돌아봐야지. 일단 오늘은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집 구하기와 어학원 등록하는 일을 제외하고 캐나다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모조리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우리는 핸드폰을 개통하러 Fido라는 캐나다의 휴대폰 통신사 대리점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손님이 좀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우리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둘이 역할극이라도 하면서 연습 좀 할 걸 후회하면 뭐하나, 이미 매장에 들어선 것을. 줄을 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깐, 우리 차례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뛰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캐나다에서 외국인이랑 대화를 하다니. 이거야 말로 실전이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드디어 우리 차례.
"Hi"
"Hi"
그가 대뜸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Korea"
그러더니 튀어나오는 말
"유학생이세요?"
헐 이럴 수가. 한국말을 듣는 순간, 반갑고도 놀라움, 약간의 실망 그리고 안도까지. 별의별 감정이 다 들었다. 이민 온 지 7년이 됐다는 남자는 유심칩 끼우는 법부터 선택할 수 있는 휴대폰 뒷번호, 통신요금 종류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한국말로.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아들었다.
허탈했지만 그래도 통화도 되고 카톡도 되고 게다가 걸으면서 구글맵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Wow, 캐나다 폰! Oh yeah! 내 캐나다 번호! 그래, 한국인 만난 건 우연이겠지. 여기 한국 아니고 캐나단데? 그렇게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괜히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매장을 나와 우리는 잠시 다운타운 서쪽에 위치한 예일타운으로 향했다. 예일타운은 밴쿠버 다운타운에서도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로 알려져 있는데 역시나 깨끗한 거리, 멋진 주택과 오피스텔 그리고 고급 레스토랑이 줄을 맞춰 서있었다. 깔끔하고 쾌적했지만 생각보단 평범하다고 느꼈다. 비싸다는 이 동네 방 한 칸은 얼마려나 하는 궁금증만 들었으니까.
예일타운을 지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처음 캐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나로서는 간판 하나부터 가게 외관까지 신기했고 심지어는 나무에 핀 평범한 꽃마저 캐나다 꽃이라 이름 붙이며 거리 구경을 했다. 4월이라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아직 완연히 따뜻한 날씨는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조깅을 하고 있었다. 캐나다인들은 추위에 강하다고 하더니 역시 다르긴 다른가보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신기했던 다른 이유는 평일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평일 낮에 한강변을 뛰는 사람들이 있고, 회사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다못해 공원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서 취미생활을 즐기는 대학생들이 있겠지만 말이다. 분명 한창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할 나이일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할일없이 조깅이나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는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 구경, 건물 구경을 하면서 걷다 보니 한 일본식 덮밥집 앞에 도착했다. 마침 배도 고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구운 고기와 채 썬 상추가 함께 올라가 있어 한국 음식점인가 싶었지만 음식점 인테리어며 종업원들의 옷차림은 영락없는 일본 음식점이었다.
"Excuse me"
주문을 하려고 하는데 저기 카운터 쪽에서 또 들린다, 한국어.
오 마이 갓. 음식점 주인 부부가 한국인이다. 우리 둘은 무슨 이런 우연이 있나 허탈하면서도 웃긴 이 상황에 주린 배를 채우느라 앞에 나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여전히 눈빛으론 대화를 나누면서. 언니, 우리 괜찮은 거야?" "나도 몰라"
은행 계좌 개설, 취업 카드 신청, 민박집에서 해먹을 음식 재료까지 성공적으로 사 오면서 우리는 다짐했다. 어학원만은 한국인이 없는, 아니 아예 없을 순 없으니 거의 없는 곳으로 가고야 말겠다고. 첫날을 혹사시킨 다리는 너무도 아팠지만 우리는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을 켜고 각자 밴쿠버의 어학원이란 어학원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한국인도 적어야 하지만 강사들이나 교육의 질도 좋아야 하고 가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한국인에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강사진과 프로그램에 대한 평이 좋고 가격 프로모션까지 하는 어학원을 찾아내 등록에 성공했다.
이제 내 캐나다 생활의 앞날은 창창할 것인가!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최대한 한국인들과 같이 지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울리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한국인이기에 한국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이 통하다 보니 어려움이 생길 때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도 한국인이다. 이것은 분명 큰 장점이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편안함과 익숙함에 젖어 낯섦과 캐나다에 온 초심을 잃는다면 초기의 목적은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또는 영어 실력을 현재보다 좀 더 향상시키기 위해서 떠났다면, 그 환경에 맨몸으로 나서야 한다.
적어도 굶거나 외로워 죽을 일은 없겠다는 자신감과 위로 정도는 얻자. 그러나 경계하자. 내 황금 같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온 캐나다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어느 정도 한국인과 거리두기를 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