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I got a job!#3. I got a job!
며칠 째 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인쇄한 이력서를 들고 거리로 나가고 있다. 하루에 족히 서른 곳은 넘게 이력서를 주며 내 성실함과 친절함을 어필하고 오는 것 같은데 어찌 된 게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없다.
이제는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학원비도 지불했고 시애틀로 여행도 다녀와서 원래부터 비루했던 내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일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상황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서비스직 밖에는 없다. 그중에서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바로 카페. 여유로운 카페(이것부터 힘든 조건이다.)에서 솔솔 풍기는 커피 향을 맡으며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농담도 주고받고, 때로는 동료들과 깔깔거리며 잡담도 하고. (안다. 놀 생각뿐이라는 걸.) 문제는 내가 커피 내리는 방법은 1도 모르고, 카페에서 일한 경험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한국에서 무얼 하며 지냈나. 그 흔한 카페 알바도 해보지 않고 말이다.
원하는 곳이 있다고 그곳에서 나를 뽑아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어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나는 어제도 오늘도 이력서를 퍼 나르고 있다. 방긋방긋 웃고 최대한 친절하게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단골 멘트는 이렇다.
"나 정말 잘할 수 있어. 한국에서 이일 저일 안 해본 게 없거든. 특히 레스토랑(때론 카페가 되기도)에서 1년 가까이 일했어. 뽑아주면 열심히 할게. 이력서 꼭 확인하고 연락 주길 바래"
개뻥이다. 레스토랑에서 일한 적이 있긴 하지만 가장 길게 일했던 기간은 고작 한 달 반이다. 한 달도 못 채우고 그만뒀던 곳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어떡하나. 일단 일을 구해야지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지 않겠는가.
그래도 매일 이력서를 돌린 보람이 있었다. 인터뷰가 3개나 잡힌 것이다. 그중 하나는 Davie St. 의 일식집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양이 푸짐하고 맛도 좋아 유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나도 어학원 친구들과 종종 가던 집이었는데 이력서를 건네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보자고 했다.
(아래 대화는 영어로 진행됐다.)
"안녕? 반가워. 너 이전에도 서빙 같은 일을 해본 적이 있니?"
"물론이지. 한국에서 이일 저일 안 해본 게 없어. 특히 레스토랑에서 1년 가까이 일했어." (위 레퍼토리 반복)
"좋아. 그럼 너 일본어는 좀 할 수 있어? 우리는 일본 손님들이 자주 오고, 그들과는 일본어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
나는 정말 일본어와는 인연이 없다. 중학교 때, 제2외국어로 한문과 일본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어쩐지 일본어보다는 한문을 실생활에서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을까 싶어 한문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도 역시 일본어와 중국어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 당시는 얼마 안 있어 중국이 경제 대국이 될 것이며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투톱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흔해빠진 예언처럼 있던 때라 자연스레 중국어를 택했다. 아주 나중에 일본어가 한국어와 어순이 똑같아 배우기 쉽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사서 혼자 공부한 적이 있는데, 히라가나만 겨우 외우고 가타카나에서 의욕을 급 상실해 때려치웠다.
여하튼 일본어를 할 줄은 모르지만 그냥 모른다고 할 수가 없었던 나는 이렇게 답했다.
"... 잘은 못하지만 몇 마디 할 줄 알아."
"오, 그래? 그럼 일본어로 이야기해볼 수 있어?"
"곤니찌와. 와따시와 만다데스.(안녕하세요. 저는 만다입니다.)"
(기대하는 눈빛)
"... 고레와 난데스까? (이것은 무엇인가요?)"
(...정 적...)
이게 유일하게 내가 몇 마디 할 줄 아는 일본어였다. 최악이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솔직함 면에서 점수를 땄을지도 모르겠다. 직원의 황당해하는 그 얼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와줘서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지만 우리랑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친절한 거절 인사를 듣고 나는 첫 면접을 끝냈다.
내가 봤던 두 번째 면접은 팀홀튼이라는 캐나다 체인의 한 카페였다. 캐나다의 던킨 도너츠와 같은 곳으로 커피뿐만 아니라 도넛, 잉글리시 머핀에 계란과 베이컨 등을 넣은 아침 메뉴,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식사를 팔았다. 커피도 다른 카페보다 저렴하고 설탕과 크림을 두 번씩 넣은 일명 '더블더블'이라는 시그니처 커피도 인기인 곳이다. 어쩐지 나는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정한 시점부터 이 카페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캐나다인들이 최애하고 또 캐나다를 대표하는 카페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나중에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집 앞 팀홀튼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이렇게 일하고 싶은 팀홀튼이기에 다운타운의 팀홀튼이란 팀홀튼에는 모두 이력서를 돌렸는데도 단 한 곳도 연락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집 앞에 있는 팀홀튼에 가서 한 직원에게 다짜고짜 이야기했다.
"저기.. 내가 지난주에 이력서를 냈었거든."
"그래? 그럼 연락 줄 거야. 기다려."
"그런데 말야, 내가 꼭 여기서 일하고 싶어서 말야. 인터뷰를 볼 수는 없을까?"
잠시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던 그 직원은 내게 다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주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이 나왔다. 자신을 매니저라고 소개한 Sean이란 이 남자는 내게 앉으라고 하더니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내게 언제 한국에서 왔는지, 얼마나 있을 건지, 그리고 한국에서는 어떤 일들을 주로 했었는지 물었다. 미리 준비했던 질문이라 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2차 인터뷰 때 보자며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이후 진행된 2차 인터뷰도 무사히 치르고 얼마 후 결과가 보이스 메일로 도착했다. 결과는 합격. 합격인 건 알겠는데 이것저것 챙겨 오라며 블라블라 말하는걸 도통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학원 선생님한테 물어 취업 카드 번호(SIN Card), 통장 계좌 번호가 적힌 종이 등을 챙겨 오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와, 드디어 일을 구했다!
팀홀튼에 합격하고 연락을 받아 뒤늦게 보게 된 세 번째 면접은 역시 집 근처에 있는 초밥집이었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아주 깔끔한 음식점이었다.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던 그 초밥집 사장은 검은 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당장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이야기했다. 일이 안 구해져 초조해하던 때는 인터뷰 한 번 보기가 그렇게 힘이 들더니, 한 곳이 합격하니 연달아 다른 곳도 합격이다. 나참. 초밥집의 장점은 아무래도 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음식값의 10 ~ 15%는 팁으로 내고 서버가 그 팁을 받으니 페이가 꽤나 쏠쏠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초밥집에서 일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나는 조금 더 염원했던 팀홀튼으로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푸근한 인상의 초밥집 사장에겐 미안했지만.
영어와 생존, 생존과 영어라는 두 가지 목표 중에 생존에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Anyway, I got a j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