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바로 너!
지방에 살던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자취를 하게 되었다. 자취를 하면서 재밌는 일들도 참 많이 겪었는데,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대학 선배였던 현 남편 구 남친과 종종 자취방에서 데이트를 하곤 했다. 집순이인 내가 허구헌 날 남편을 집으로 불러대 남편은 답답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취방 데이트를 좋아했다. 편한 잠옷을 입고 티비를 보기도 하고 답답하면 집 근처 카페를 가기도 하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게 데이트가 맞나 싶긴 한데..)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내가 남편을 자취방으로 초대해 데이트를 했었다. 엄마표 비빔국수를 좋아하는 나는 가끔 엄마 비빔국수가 생각날 때면 집에서 해먹곤 했는데, 그 날 따라 남편에게도 그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취방의 조그만 부엌에서 나는 요리를 했다. 국수를 삶고 양념장을 만들어 양푼에 잘 비벼 주었다. 잘 비빈 국수는 각자 먹을 그릇에 나눠 담고 또 구색은 맞추겠다고 오이도 얇게 채썰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삶은 달걀 반 개도 그릇에 각각 올리니 꽤 그럴싸해 보였다.
학교 앞 5평 정도 되는 작은 자취방. 변변한 식탁은 없었고 직사각형의 작은 앉은뱅이 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비빔국수를 담은 그릇 두개를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더니 어느새 상이 꽉찼다. 재미있는 티비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우리는 상에 앉아 둘만의 만찬을 시작했다.
뭐든 잘 먹는 남편이지만 특히 내가 한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김치찌개를 해준 적이 있는데, 밥을 네 공기 먹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날 만든 비빔국수는 내 입맛에도 아주 맛있었다. 그러니 남편 입맛엔 오죽했으랴. 남편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기고, 티비를 보며 비빔국수를 먹고 있던 그 때였다.
'비빔국수를 반 절 정도 먹으면 먹어야지' 하고 남겨 두었던 계란 반 개가 이상했다.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자르고 나면 타원형의 단면에 노른자는 한 쪽으로 좀 치우쳐 있고 다른 부분은 흰자로 가득하지 않나. 치우친 노른자 부분에 조그맣게, 그렇지만 티는 날 정도로 치아 자국이 나있었다. 아까 자를 때 잘못 잘랐나, 아님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먹었나 싶었다가 아무래도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이 인물이 수상스러웠다. 의심스럽다고 대뜸 "너지!"라고 할 수는 없는 법. 아닌데 의심했다간 괜히 빈정상할 수 있으니 일단 기회를 엿보고 현장을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지켜보기로 했다.
비빔국수를 먹으며 다시 티비에 열중하는 척하던 그 때였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손과 젓가락이 슬그머니 내 그릇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 젓가락이 내 소중한 삶은 달걀 반개를 잡던 그 순간, 어느 유명한 강력계 형사 못지 않게 날렵한 손놀림으로 그 범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역시 범인은 너였구나!"
비빔국수를 먹다 말고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너무 웃겨 방바닥에 누워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비빔국수 위 삶은 계란, 그 하찮은 깨문 자국이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