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레이지 파머스>
“아유~통통하니 귀엽게 생겼네.”
두둥.
나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통통이라니, 내가 통통이라니!!!!‘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친구와 함께 신발을 구경하러 들어간 가게에서 주인아저씨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꽤 통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터라 분명 아저씨한테 들은 게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어쩐지 나는 그날을 내 인생 처음 통통하다는 말을 들은 날로 기억하고 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이불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결심했다. 살을 빼겠다고. 마침 방학이라 잘됐다 싶었다. 나를 유혹하는 온갖 군것질들을 뿌리치고 집에만 처박혀 수행하듯이 한 달간 살아 보기로 했다.
식단은 단순했다. 흰 밥 1/2 공기와 무생채. 무생채는 밥 위 두 가닥에서 세 가닥 정도 올려 먹었다. 삼시 세끼가 모두 동일했다.
운동은 딱 1시간 했는데, 당시 화제였던 몸짱 아줌마가 소개해준 근력 운동 몇 가지를 30분 동안 하고, 나머지 30분은 바닥에 방석을 깔고 제자리 뛰기를 했다. 맞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방석이 충격을 잘 흡수했던 것인지, 마음씨 좋은 아래층 거주인들이 참고 넘어가 주신 것인지, 다행히도 ‘제발 좀 작작 좀 하라’는 연락은 없었다.
무식하게 했던 내 인생 최초의 다이어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한 달 후 몸무게는 무려 7킬로가 빠져 있었다.
“뭐야, 쟤 누구야?”
“희주 아냐? 살 엄청 빠졌어!”
개학식 날,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을 듣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달 동안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통통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번 시작한 다이어트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데다가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얼마 간 정신을 놓고 먹다 보면 어김없이 살이 토실토실 올라 있었다. 다이어트가 생활이 되다 보니 자연스레 간식 대신 먹을 게 필요했다. (간식을 끊을 순 없지 않은가.) 이때 찾은 게 견과류였다.
쉽게 구할 수 있어 주로 아몬드를 먹곤 했는데 표면이 거칠고 혀에 달라붙는 껍질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땅콩을 먹자니 언젠가 티비를 보면서 겨울 귤 까먹듯 땅콩을 흡입하다가 배탈이 나 화장실 변기 위에서 하루 종일 고생한 적이 떠올라 포기했다. 그러다 만난 아이가 바로 캐슈넛이었다. 반질반질하고 매끈한 표면, 씹어도 묻어 나오지 않는 껍질, 고소한 향,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었다.
이름마저 예쁜 캐슈넛, 캐슈넛은 내게 있어 견과류 계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오빠, 캐슈넛 크림 파스타가 있대!”
매주 주말 채식 식당 탐방을 다니면서 이번 주는 어디를 가볼까 네이버 지도를 검색하던 나는 <레이지 파머스> 메뉴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주 주말 <레이지 파머스>로 향했다.
하얏트 호텔 앞 필리핀 대사관 근처에 위치한 <레이지 파머스>는 공간부터 너무나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목조로 된 내부, 햇빛이 들어오는 큰 창, 햇빛을 쬐고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조화로웠다. 마치 숲 속에 있는 집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볕이 잘 드는 2층에 자리를 잡고선 캐슈넛 크림 미소 파스타와 에그인헬 with 포카치아, 그리고 타트 체리 에이드를 한 잔 주문했다.
가장 먼저 나온 타트 체리 에이드는 잘게 간 체리가 들어가 있었는데, 음료를 마실 때 빨대로 빨려 들어와 씹히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신맛은 거의 없고 적당하게 달았는데 음식과 맛이 강하지 않아 음식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나온 캐슈넛 크림 파스타가 나왔다. 큼직한 새송이 버섯과 바삭한 연근칩이 올라갔고 옅은 갈색의 크림으로 덮인, 난생처음 보는 크림 파스타였다. 캐슈넛으로 크림을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검색해 보니 캐슈넛으로 크림치즈를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당연히 숟가락을 들고 크림부터 맛을 봤다.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분명 늘 먹던 크림 파스타의 크림과는 달랐지만 맛있었다. 고소했고 캐슈넛 맛도 났다. 들깨 같은 맛도 느껴졌다.
위에 올리간 연근칩은 살짝 눅눅했지만 은은한 단맛과 연근향이 기분을 좋게 했다. 방구석에 누워 티비를 보며 먹으면 끊임없이 들어갈 맛이었다. 고사리는 면과 함께 후루룩하며 맛봤는데 약간의 꼬들함이 참 좋았다.
파스타에 정신을 뺏겨 헤롱거릴 때쯤 에그인헬이 나왔다.
토마토소스에 계란 세 개가 퐁당 빠져있는 에그인헬은 포카치아 빵과 함께 제공됐다. 토마토소스에 오븐에 데워져 울긋불긋한 치즈, 살짝 모습을 드러낸 방울토마토 세 개와 그 옆에 뿌려진 바질 세 잎까지 자태가 아름다웠다. 함께 제공된 숟가락으로 소스 안에 깊게 넣어 계란 하나를 온전히 꺼내는 데 성공했다. 소스는 살짝 매콤했고 계란은 잘 익어 포슬포슬했다. 무엇보다 빵이 맛있어서 에그인헬은 한참 남았는데 빵은 동이 먼저 동이 날 정도였다.
“배 터질 것 같아. “
나와 박군은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트에 들러 캐슈넛 한 봉지를 샀다. 캐슈넛 크림치즈를 만들어 볼까 하는데, 똥손인 내가 잘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아이라면 뭐든 되겠지.
캐슈넛, 네 변신은 무죄다, 땅땅!!
상호: 레이지 파머스
식당 종류: 비건 & 채식 식당
주문 메뉴: 캐슈넛 크림 미소 파스타(24,000원), 에그인헬 with 포카치아(25,000원), 타트 체리 에이드(7,000원)
디카페인 커피: 있음(+500원)
가격대: 24,000~26,000원
영업시간: 매일 오전 11시 30분 ~ 오후 9시 30분
휴무: 없음
주소: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35길 5 A동 레이지파머스
캐슈넛으로 만든 크림 파스타라니 놀랍기도 했지만 저는 고사리가 들어갔다는 데 더 흥미로웠어요. 맛도 있는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 이질적이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아무래도 들어간 재료들 모두 몸에 좋고 부담도 안 되는 것들이라 그런 것 같아요. 다만, 다 먹을 때쯤 살짝 물리고 느끼하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함께 먹은 에그인헬은 특별하진 않았지만 빵과 함께 먹는 게 정말 맛있었어요. 빵이 킥이었달까요?
다음에 방문한다면 제가 좋아하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와 토마토 루꼴라 화덕 피자를 먹어 봐야겠어요. 아무래도 머지않아 방문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