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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Oct 01. 2024

4. 오늘부턴 훈제 연어 대신 훈제 당근

강동구 <지구를 위한 노래>

대학교 신입생 시절, 내게는 이상한 로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해보는 것.

귀여운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게 어쩐지 멋져 보였는데, 어른이 되면 응당 그런 레스토랑에서 한 번쯤 일을 해봐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렇게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학교 근처 뷔페형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을 시작했다.


멋지다고만 생각했던 그 일은 나름 재밌었지만 힘들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하루 종일 서서 홀을 누비다 보면 퇴근하기 전부터 다리가 퉁퉁 부어있기 일쑤였다. “반갑습니다, OO입니다.”하는 밝고 경쾌하게 느껴지던 인사도 하루 종일 하다 보니 따분하고 지겨웠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술 약속과 학과 행사들로 놀 일이 가득한데 알바 때문에 참석할 수 없을 땐, 멋모르고 알바를 시작한 나 스스로를 원망하곤 했다.


그래도 알바를 하면서 낙이 있었다면, 그건 ‘해피 아워’였다. ‘해피 아워’는 영업을 마치고 손님들이 가게를 모두 떠나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모여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했다. 매일 ‘해피 아워’를 즐긴 것은 아니었고, 2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기준으로 날을 정해 ’해피 아워‘를 즐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날만큼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며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해피 아워‘때면 낮에 손님들이 맛있게 먹던 음식들을 찾아 하나하나를 맛보곤 했는데, 인기 메뉴였던 훈제 연어만큼은 손이 가지 않았다. 동료들도 훈제 연어는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 메뉴였지만, 나에게는 훈제 연어에서 풍기는 연어 특유의 향과 훈제 향이 묘하게 느껴져 내키지 않았다. 그때 맡은 냄새 때문인지 나는 훈제 연어뿐만 아니라 훈제 오리도, 훈제 삼겹살도, 훈제 닭가슴살도 즐기지 않게 되었다.






“흐음….”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시그니처’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데, 메뉴 이름이 글쎄 ‘훈제 당근 샌드위치’가 아닌가.

훈제 연어가 연상되는 ‘훈제 당근 샌드위치’를 쉽사리 고르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고 나는 계속 보면 답이라도 나올 것처럼 메뉴판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톡톡짜이 한 잔이랑, 훈제 당근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고민 끝에 주문을 했다. 카운터 너머 방긋방긋 웃고 있던 인상 좋은 직원 분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못 먹기야 하겠어.’


주문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마음이 편안하니 그제서야 가게 안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아늑했다. 편안한 동네 카페 같기도 했고, 친구집에 놀러 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물론, 카운터 맞은편 한쪽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나 가게요’하고 정체성을 뿜뿜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창가 앞자리, 책꽂이의 여러 책들의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하나 꺼내 읽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음식이 나왔다.



창가석 자리와 주문한 메뉴



기다란 유리병에 담겨 나온 톡톡짜이는 귀여운 팔각이 위에 올라갔는데, 이국적인 팔각향이 은은한 홍차향과 잘 어울렸다. 목도 말랐겠다, 한 모금 쭉 들이키니 진한 단 맛이 느껴졌다.

 

포장지에 싸여 접시에 담겨 나온 ‘훈제 당근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박군이 왔으면 실망했겠어.‘


속으로 생각하곤 반으로 잘린 샌드위치 반조각을 집어 들었다.


토종밀로 만들었다는 두툼한 빵에 노란색 홀그레인 머스터드 소스가 양쪽에 발라져 있었고, 상추, 토마토, 오이 그리고 얇게 썬 훈제 당근이 들어 있었다. 코를 샌드위치에 가까이 대니 훈제 향이 강하게 났다. 훈제 연어에서 나는 향보다 강했지만 어쩐지 괜찮았다. 아마도 연어 냄새가 나지 않아서 아니었을까? 훈제 향에 이어 난생처음 맡아보는 진한 양념 향도 났는데, 그 진한 농도 탓인지 포장지에도 빨간 양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젖은 포장지를 살살 벗겨내 빵을 한 입 베어 물었고, 어느새 양손바닥은 빨간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진한 양념이 묻어 나는 훈제 당근 샌드위치와 팔각이 올라간 툭툭짜이



당근은 얇게 썰어 조리를 했지만 여전히 단단했다. 생당근보단 아주 살짝 부드러웠지만 ‘아삭’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한 식감이었다. 당근을 씹을수록 훈제 향이 아주 강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처음 맛보는 빨간 양념 맛이 느껴졌다. 양념 맛은 가히 놀라웠는데, 마요네즈인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맛이 났고 파프리카 가루를 넣었는지 살짝 매콤함도 느껴졌다. 직원 분께 여쭈니 훈제 당근을 만들 때 들어가는 소스라고 하셨다.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더 물었다간 영업 비밀을 캐묻는 곤란한 손님이 될 것 같아 포기하고 돌아섰다. 취나물과 참나물로 만든 페스토도 샌드위치의 강렬한 맛에 한몫했는데, 느끼하지 않고 상큼하면서 감칠맛이 났다.


훈제 당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어쩐지 나는 이 샌드위치가 김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료의 향과 맛을 살리는 음식이 있다면, 갖은양념을 해서 재료의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음식 김치 말이다. 배추는 소금에 재워 숨을 죽이고, 고춧가루와 젓갈, 간 채소들을 넣은 양념으로 맛을 낸 김치처럼 훈제 당근 샌드위치도 새로운 양념과 조리법으로 재탄생시킨 샌드위치였다.


훈제 당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양념과 조리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평범한 재료지만 양념에 따라 다채로운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냄새가 날 것 같아 열심히 씻었는데 역시나 옅은 훈제 향이 손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향이 싫지 않았다.


진한 훈제 향이 나는 훈제 당근 샌드위치를 나는 이제 기꺼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부턴 훈제 연어 대신 훈제 당근이다.






식당소개

상호: 지구를 위한 노래

식당종류: 비건 식당

주문 메뉴: 훈제당근 샌드위치(11,900원), 톡톡짜이(7,000원)

디카페인 커피: 없음

가격대: 11,900원 ~ 14,500원

영업시간: 화요일 ~ 일요일 오전 11시 ~ 오후 9시

휴무: 매주 월요일

주소: 서울 강동구 명일로12길 6 1층 지구를위한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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