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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Oct 09. 2024

5. 누구에게나 이상적인 바로 그 김치

강남구 <채근담> 역삼점

기후 변화 대응 비영리 단체인 현 회사에 근무하기 전 나는 국제기구 모금부서에서 6년 간 일했었다. 일한 지 1년쯤 지났을까? 새로운 동료 A를 맞이했다. A는 국제환경단체 출신이었는데 건강해 보이는 그을린 피부와 똘망하고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A가 합류한 첫날, 나 포함 다섯 명의 팀원들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려고 모여 메뉴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채식주의자시면 우리 한식 먹으러 갈까요? “


A가 채식주의자라는 말에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메뉴를 제안했다. 그러자 A가 대답했다.


“한식이어도 채식이 아닐 수 있어요. 고기로 육수를 내고,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거든요.”


물론 떡갈비나 생선구이,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채식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고기반찬 없는 한식이라면 채식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던 나로서는 A 입에서 나온 대답이 놀라웠다. A의 대답을 듣고 나서 채식주의자가 밖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채식주의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식은 국물 육수를 멸치나 고기로 내고 액젓으로 감칠맛을 내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게다가 젓갈이 안 들어간 김치라니, 사찰음식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채식주의자가 갈 만한 한식당은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채식주의자 유형 중 A는 계란이나 유제품, 생선은 섭취하는 ‘페스코’라고 하기에 노릇노릇한 계란후라이가 올라가는 비빔밥집으로 갈지 숯으로 고등어를 구워 내주는 생선구이집으로 갈지 고민하다가 우동집에 가 맛있는 판모밀을 먹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개인 일정 때문에 회사에 휴가를 쓴 날이었다. 오전에 안과에 들러 검진을 마치고 박군과 역삼역에서 만났다. 채식 한식당이 있단 소문을 들어가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역삼역에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강남 파이낸스 센터 지하에 있는 <채근담>으로 향했다. <채근담> 입구 이곳저곳에는 ‘미슐랭 가이드’라고 적힌 빨간색 포스터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급 한정식집 같은 느낌에 가게에 들어서기 주저하고 있었는데 활짝 열린 채로 고정된 자동문이 ‘편히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용기를 내 문턱을 넘었다. 카운터 너머에서 연세 지긋해 보이는 사장님의 인자한 미소 덕이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는 큰 방이 나왔다. 우리는 문 옆 4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꼼꼼히 구경하긴 했지만 역시 입구에서 봐두었던 메뉴 ‘자연반상’을 주문했다. 평일 점심 메뉴 가격이 49,000원에서 79,000원으로 저렴하진 않은 편인데, 29,000원인 자연반상을 발견하고 ‘옳다구나‘하고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자리에서 주문했다. 나오는 음식이 모두 채식이냐고 여쭈니 고기 메뉴가 있어 다른 메뉴로 바꿔주시기로 하셨다. 고기도 상관없긴 했지만 이왕 온 거 채식으로 맛보자고 마음먹고 바꿔달라고 했는데, 새우는 괜찮냐고 물으셔서 좋다고 말씀드렸다. (차마 새우는 포기할 수 없었다.) 식당은 음악을 틀지 않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와 음식을 나르는 카트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정갈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덜컹-덜컹-”


문 밖 복도에서부터 요란한 바퀴 소리가 들리더니 음식을 실은 카트가 도착했다.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분은 음식 여러 개를 순식간에 테이블에 세팅해 주셨다. 처음 나온 음식은 놋그릇에 담긴 노란색 호박죽과 흰 자기 그릇에 담긴 동치미, 그리고 샐러드와 잡채였다. 놋수저와 놋그릇이라니,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고 자세도 고쳐 앉게 됐다. 유자 소스가 들어간 샐러드와 아삭한 오이, 무가 들어간 동치미는 상큼 새콤해 입맛을 돋웠고 적당한 단맛의 호박죽은 허기졌던 뱃속을 달래기 좋았다. 호박죽 한 그릇을 비우니 당이 충전되는 것처럼 눈꺼풀에 힘이 들어가고 기분도 살짝 업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요리를 맛봤다. 잡채는 파프리카와 시금치, 부추, 버섯이 들어갔고 그 위에 깨가 조금 뿌려져 있었다. 얇고 탱글한 면이 씹기 좋았고 간도 적당해서 누가 말리지 않으면 계속 들어가는 맛이었다. 박군과 나는 한창 유행 중인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명대사를 흉내 내며 음식 맛을 보고 또 즐겼다.



샐러드와 동치미


잡채와 호박죽



잡채를 절반 정도 먹었을 때쯤 다음 요리가 나왔다. 육전에서 변경한 새우가지전과 송이관자구이였다. 새우가지전은 가지 안에 새우와 양파를 다져 넣어 계란으로 부쳐 냈는데 돌돌 말아 얇게 썬 대추가 올라가 먹기 전에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새우의 탱글한 식감이 좋았고 양파의 달고 매운맛이 올라왔다. 너무 맛있어서 인당 하나만 나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버섯에 칼집을 내서 달달하고 짭조름한 양념에 구워낸 송이관자구이는 칼집의 결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게 재밌었다. 물론 맛도 있었다.


이제는 정겹게 느껴지는 카트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음식이 나왔다. 계란 후라이가 올라간 비빔밥과 버섯과 두부가 가득 들어간 된장찌개,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였다. 비빔밥에는 당근, 콩나물, 새싹채소, 버섯, 노각장아찌, 정체는 모르지만 맛있는 들깨에 버무린 나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잡채가 들어가 있었다. 원래 냉장고 속 재료들을 몽땅 넣어 비벼 먹는 게 비빔밥이므로 크게 이상하다고 느낀 비빔밥 속 재료는 없었지만 잡채가 들어간 것만큼은 독특하게 느껴졌다. 비빔밥의 고장인 내 고향 전주에서도 잡채가 들어간 비빔밥은 먹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갸우뚱했지만 맛을 보다 보니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밥 위에 잡채를 반찬으로 얹어 먹는 것 같기도 하고 밥을 먹다가 면이 딸려 올 땐 면이 조금 남은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 같아 반가웠다. 된장찌개는 진하고 구수한 맛에 호박, 버섯, 부추, 두부가 가득 들어가 떠먹기도 하고 비빔밥에 넣어 비벼 먹기도 했다.


사실 이 식당에서 제일 기대가 되었던 것은 바로 김치였다.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서 김치를 담글 때 빼먹지 않는 재료가 바로 젓갈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광주가 고향인 외할머니 김치를 주로 먹다 보니 내 입맛은 젓갈이 들어간 감칠맛이 감도는 김치가 딱 맞았다. 일평생 젓갈이 들어간 김치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과연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낯선 세계의 음식인 마냥 기대가 되기도 했다. 겉으로 봤을 땐 영락없는 김치였다. (당연하다.)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던 것은 건더기가 없이 깔끔하다는 것. 김치 한 조각을 들어 맛을 보았다. 아삭거리는 배추의 식감, 매콤한 맛, 좀 실망스럽게도 크게 다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살짝 가볍고 샐러드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깔끔하고 아주 맛있는 김치였다.



비빔밥과 된장찌개, 맛있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깔끔한 김치


후식으로 나온 떡과 오렌지 한 조각, 매실차까지 마시고 나니 온몸이 개운하게 느껴졌다. 어제 먹은 라면으로 살짝은 더렵혀진 내 몸을 세정한 느낌이랄까? (라면은 내 소울푸드 중 하나다.) 다 먹고 나니 창가 쪽에 있는 맞은편 테이블에 직장인 넷이 자리를 잡았다. 슬쩍 보니 우리와 같은 자연반상을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분들도 배달음식 등으로 망가진 몸을 클렌징하러 오신 것은 아닐지 혼자서 쓸데없는 추측을 해보았다. 어쨌든 아주 맛있고 건강한 한 끼를 맛볼 거라는 건 내 장담합니다.



식당소개

상호: 채근담 역삼점

식당종류: 비건 메뉴가 있는 채식 식당

주문 메뉴: 자연반상 (29,000원)

디카페인 커피: 없음

가격대: 29,000원 ~ 79,000원

영업시간: 월~토 오전 11시 30분 ~ 오후 21시 30분 (오후 15시 ~ 17시 30분 브레이크 타임)

휴무: 매주 일요일

주소: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52 강남파이낸스센터 B1


박군의 시식평


채근담은 강남에 위치한 한식 채식집입니다. 지금까지 가본 채식 전문 음식점은 대부분 양식이었는데, 한정식을 파는 식당이라 조금 의아했습니다. 내부 인테리어도 정갈하고 고급스러워서 포털 사이트에선 상견례 맛집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입구 초입에는 한식 그릇을 팔기도 했고, 프라이빗 룸부터 개별 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룸을 보유한 식당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코스요리는 가격대가 좀 있었고, 저희가 먹었던 비빔밥 코스는 직장인 점심이라기엔 가격대가 있지만 외식 가격으론 적당했던 것 같아요. 비빔밥 외에도 전채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로 제공되었고 모든 음식의 퀄리티는 중상이었습니다. 분위기부터 음식 맛까지 왜 상견례 식당으로 유명한 곳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거나 외국인 친구에게 한식 채식요리를 맛 보이고 싶을 때 방문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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