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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Oct 15. 2024

6. 어른이라면 고사리

중구 <고사리 익스프레스>

어릴 때는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색깔은 어두운 녹색인 데다가 물컹한 식감인 시래기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어 엄마가 우거지 국을 끓일 때면 국물만 먹어 그릇 바닥에는 시래기만 남아있곤 했다. 청국장은 둥둥 떠다니는 말도 안 되는 콩과 먹으면 하루종일 옷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싫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이 두 음식은 없어서 못 먹는 그야말로 내 최애 음식이자 재료가 되었다. 감자탕에 들어 있는 푹 삶은 무청은 고기보다 맛있고, 김치와 두부를 왕창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청국장은 밥과 함께 먹으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이후에도 손이 잘 가지 않던 식재료도 있었다. 엄마가 육수를 낼 때 사용하고 국 속에 남아 있던 커다란 멸치, 보라색으로 변해버린 오징어국 속 오징어, 익힌 굴, 그리고 고사리이다. 거무죽죽한 색깔에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고사리는 도저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렵게 용기를 내 맛을 보더라도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아서 오랫동안 시도도 하지 않았다. 물론, 고사리를 먹을 기회가 많지도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고사리 전문 음식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큰맘 먹고 방문했다.




많은 직장인들이 가장 신나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성수에서 박군은 판교에서 출발해 신당에서 만났다. 요즘은 신당이 핫하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좁은 골목이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정겨운 시장 음식과 막걸리를 마시는 가게 중에서도 <고사리 익스프레스>는 눈에 띄었다. 간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밝은 빛과 가게 앞에 놓인 야외 테이블 서너 개, 그리고 사람들은 테이블 앞에 앉아 발게진 얼굴로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가게는 리모델링을 했는지 낡고 오래된 가게들 사이에서 혼자만 비교적 새것처럼 번쩍거렸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은 요리를 하고 계셨고 직원으로 보이는 분들은 주문을 받고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젊고 활기차 보였다. 가게 안과 밖에 손님으로 꽉 차 나와 박군이 하나 남은 야외 테이블 앞에 서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본 직원 한 분이 황급히 오시더니 자리를 안내해 주셨고, 부족한 의자 하나도 가져다주셨다.


<고사리 익스프레스> 외관, 음식을 다 먹고 나오면서 찍었는데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많이 떠난 모습


뭘 주문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사리 들깨 파스타와 고사리 누들 떡볶이, 알배추구이를 주문했다. 고사리와 들깨, 고사리와 떡볶이, 맛이 상상되지 않아 더욱 궁금해졌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치가 나왔다. 그런데 그냥 김치가 아니라 토마토 김치였다. 토마토를 적당한 크기로 썰었는데 한눈에 봐도 평소에 먹던 토마토는 아닐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춧가루가 군데군데 보였고, 평소에 본 토마토보다 더 불그스름한 게 확실히 김치 같았다. 맛을 보니 꽤 매콤했고 촉촉하고 상큼해 입가심하기 좋았다.


토마토 김치


김치 한 접시를 다 먹고 추가로 주문한 접시가 나올 때쯤 고사리 들깨 비빔면이 나왔다. 고사리 오일로 요리했고, 병아리콩으로 만든 페스토를 위에 올렸다고 젊은 사장님이 설명해 주셨다. 과연 비빔면은 오일에 자작하게 담겨 있었고 면 위에는 병아리콩 페스토와 구운 버섯, 잘게 썬 쪽파와 참깨가 올라가 있었다. 언뜻 보면 건강한 재료가 올라간 피자 같기도 했다. ‘고사리가 맛이 있을까’ 궁금증 반, 의구심 반으로 맛본 음식은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고소한 고사리 오일과 들깨 맛이 무척 좋았다. 면은 통통하고 쫄깃해서 씹는 즐거움이 있었다. 한입 맛볼 때마다 ‘너무 맛있다’를 외치면서 먹었다. 박군도 마찬가지였다.


고사리 들깨 비빔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양배추 구이도 나왔다. 당근을 으깨 만든 퓨레가 접시 맨 아래 깔려 있었고, 고사리 오일과 칠리로 만든 붉은 소스가 구운 양배추 위에 넉넉히 뿌려져 있었다. 역시 사장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인기 메뉴인 당근 모모에 들어가는 소스와 동일하다고. 단호박과 같은 부드러운 질감에 은은한 단맛이 나는 당근, 촉촉하면서도 아삭아삭 소리가 나는 양배추, 그리고 매콤 달콤한 칠리소스, 세 재료의 맛이 조화로웠다. 계속 먹어도 잘 질리지 않는 맛이라 술안주로 먹기 좋을 것 같았다. 아, 우리도 술을 주문했다. 나는 복분자 스파클을, 박군은 토끼 하이볼을 주문했다. 음식과 함께 주문했지만 음식이 나오고도 절반 정도 먹고 난 후에야 술을 가져다주셨다. 손님 수에 비해 직원 손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맛있는 음식 때문이었는지, 친절한 사장님과 직원분들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불금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누들 떡볶이가 나왔다. 떡은 떡볶이라고 하기엔 얇았고, 그렇다고 우동이라고 하기엔 두꺼웠는데, 내 취향엔 아주 딱이었다. 면처럼 길어서 후루룩 먹기에도 좋았다. 듬뿍 들어있던 표고버섯도 쫄깃하고 간이 잘 배어 있어 씹을 때 맛있는 채즙과 양념이 새어 나왔다. 살짝 매콤하고 얼얼한 맛이 났는데, 음식을 다 먹고 계산할 때 사장님께 슬쩍 여쭈니, 알싸한 맛의 정체가 바로 고사리라고 하셨다. 고사리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감자를 좋아하는 나는 감자 퓨레가 같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접시 위의 감자 퓨레가 색깔도 맛도 고구마라 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잠시 상심했지만, 역시 사장님께 여쭈니 고구마로 시도해 보고 계신다고 해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참고로 나는 별명도 감자다.)



고사리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으니 우습게도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어른이라면 고사리쯤은 맛있게 먹어야지.

나와 박군 모두 기분 좋게 부른 배를 두들기며 가게를 나섰다. 이제는 밤에 쌀쌀할 줄 았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혀있다. 아직은 여름이 떠나기 아쉬운가 보다.






식당 소개

상호: 고사리 익스프레스

식당 종류: 비건 메뉴가 있는 채식 식당

주문 메뉴: 고사리 들깨 비빔면(15,000원), 고사리 누들 떡볶이(23,000원), 알배추구이(10,000원)

디카페인 커피: 없음

가격대: 8,000원 ~ 23,000원

영업시간: 화~일 오전 11시 30분 ~ 오후 22시 (21시 30분 라스트 오더)

휴무: 매주 월요일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85길 12-10 1층


박군의 시식평


최근까지도 핫한 동네 신당, 그곳에 있는 채식 레스토랑 <고사리 익스프레스>는 살짝 의아했습니다. 한식 위주의 노포 식당이 많은 신당 골목에 <고사리 익스프레스>라는 채식 식당이 덩그러니 불을 밝히고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손님으로 가게 안이 꽉 차있어 기대가 컸습니다. 메뉴는 많지 않아 제가 생각하는 맛집의 기준에 부합했고요. 고사리 들깨 비빔면 맛에 한 번 놀라고 고사리 누들 떡볶이에 두 번 놀랐어요. 제일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아무래도 고사리 누들 떡볶이였던 것 같습니다. 제주의 우진해장국과는 또 다른 맛의 고사리 요리였고, 이런 채식 요리라면 매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떡볶이 밀키트를 판매하고 있는 걸 보니 이 집의 시그니처 음식인 것 같아요. 신당은 즉석 떡볶이로도 유명하지만 아마도 머지않아 이 고사리 누들 떡볶이가 신당의 유명인사가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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