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째 날
"OO야, 어서 일어나, 병원 가자."
평소 같으면 집에서 쉬는 게 낫는 거라고 최대한 버텼을 텐데,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불과 3~4시간 전까지만 해도 3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위로 아래로 쏟아 내느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에 문제가 단단히 났는지 열까지 나서 근육통으로 온몸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분명 어제저녁 남자친구가 해준 닭볶음탕을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딸기까지 야무지게 먹었건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밤새 난리였다. 하루 종일 붙어 다닌 남자친구와 삼시 세끼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나만 탈이 난 것으로 봐서는, 먹은 게 잘못된 게 아니라 갑자기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위가 놀란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친구가 제주도에 오고 나서 먹은 음식들은 이렇다.
첫날: (아점) 우진해장국, 빈대떡, 막걸리, (간식) 우무 푸딩, 레몬차, 쿠키, (저녁) 제주 흑돼지
둘째 날: (아침) 토스트, 휘낭시에, 이름 모를 빵, 아이스 아메리카노, (점심) 전복가마솥밥, (저녁) 제육쌈밥, (야식) 와인, 치즈 플레이트, 올리브
셋째 날: (아침) 청귤 요거트, 과일, 밤빵, (간식) 당근주스, (점심) 회특정식, (저녁) 집밥
넷째 날: (아침) 커피, (점심) 올래국수, (저녁) 닭볶음탕, (후식) 딸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넷째 날 아침, 그러니까 어제, 제주 시내에 있는 고기국수를 먹으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한 20분 탔을까, 속이 메스껍고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참고 참다가 제주 시내에 거의 다 와서 버스에서 내려 근처 공중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봤었는데, 원래도 멀미를 하는 체질이라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증상이 괜찮아지길래 나는 '멀미를 했나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올래국수>에서 한 그릇 가득 나오는 고기국수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고 저녁에는 남자친구가 만들어 준 닭볶음탕에 밥도 비벼 먹고 말았다. 너무 많이 먹었다고 이제와 후회해 본들 뭐 하나. 어젯밤 구토와 설사가 도저히 멈출 기미가 안 들어 서울도 아니고 제주도, 그것도 제주 시내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세화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변기통을 붙잡고 고민했었다.
계속되는 변기의 부름에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편히 자는 건 고사하고, 누우면 속이 더 안 좋아져 바닥에 앉아 침대에 머리만 살짝 기대곤 조금이라도 속이 울렁거리면 화장실로 튀어 갈 준비를 했었다. 평소에는 작은 뒤척임에도 일어나던 남자친구가 이날 따라 아무리 부스럭 거리며 화장실을 다녀와도 한참을 깨지 않았다. 코까지 골며 꿀잠을 자는 남자친구가 얄미워질 때쯤, 남자친구가 잠에서 깼다.
'나 좀 살려줘'하는 표정이었던 건지 남자친구는 상황파악을 하곤 휴대전화로 이것저것을 검색하더니 응급실을 가자고 했다. 그 와중에 병원은 가기 귀찮았던 나는 한 시간만 기다려 보자고 말했고, 병원에 가기 싫은 마음에 내 몸이 반응한 건지, 다 게워내어 이제는 쏟아낼 게 없었던 것인지 거짓말같이 구토와 설사가 멈췄다.
그렇게 밤새 사투를 버리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남자친구가 제주에 없었다면 침대 속에서 열이 내리길 기다리며 무식하게 버텨냈을 텐데, 아프면 병원으로 곧장 가서 해결을 봐야 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아침 일찍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것이다. 3.1절이라 다들 쉬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진료를 보는 병원이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비벼 눈곱만 살짝 뗀 후 패딩을 걸치고 나왔다.
남자친구가 찾은 병원은 집 앞에 있는 <세화의원>이었다. 파란색 배경에 흰색 글씨로 '세화의원'이라고 적힌 간판은 연식이 되어 보이는 낡은 건물 앞 좁은 입구 위에 걸려 있었다. 세화해변을 가는 길목에 있어 매번 지나쳤던 건물인데, 병원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간판 아래 걸려 있는 진료 시간 안내와 휴진 안내는 아주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가던 병원에서 봤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낡은 시설에 걱정이 들었던 나는, 갈 수 있는 병원이 여기밖에 없었냐고 남자친구에게 묻고 싶었지만 밤새 구토와 설사를 하느라고 힘도 없었거니와, 오늘 새벽 제주에 있는 병원 응급실을 찾는 남자친구에게서 큰 병원은 제주 시내와 서귀포 시내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터라 세화에, 게다가 3.1절에 문을 연 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3.1절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환자는 나 밖에 없었기에 접수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에는 머리가 군데군데 희끗한 남자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계셨다. 희끗한 머리에 비해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으셨는데, 내 증상을 들으시곤 무언가 잘못 먹고 탈이 난 것 같다고 하셨다. 약 먹고 쉬면 곧 나을 거라며 염려 말라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 죽진 않겠어' 싶었달까?
진료를 마치고 세화의원 바로 옆 건물 1층에 있는 제일약국에서 약을 지어 집에 돌아왔다. 빈속이었지만 도저히 입에 뭐를 넣을 상태는 아니었던지라 약부터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밤새 잠을 못 잤더니 피곤이 몰려왔다. 2~3시간 잤을까? 부엌에서 남자친구가 무언가를 만드는지 분주한 소리가 났다. 얼마 안 있어 남자친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잘 잤어? 죽 끓여 놨으니까 어서 먹고 약 먹자."
"죽? 무슨 죽?" 나는 궁금해 물었다.
"나와 봐."
식탁 위에 따뜻한 죽이 한 그릇 놓여 있었다. 냄비에도 남은 죽이 가득했는데, 언제 장을 봐서 이렇게 손수 죽까지 끓여 놓았는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밤새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지만 않았어도 눈물 한 방울은 흘렸을 거다. 곧 있으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마지막 날 여자친구 간호만 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죽을 먹고 약도 먹으니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내가 자는 동안 돌아갈 짐도 다 싸놓았다. 집에 있으라는 남자친구 말에 코앞인데 배웅도 못하냐며 기어이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섰다. 두 번째 배웅이었다. 처음 배웅하던 날에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있을 생각에 설레는 마음 반, 걱정스러운 마음 반이었는데, 이제는 곧 돌아가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제는 익숙해진 101번 버스에 남자친구가 오르고, 우리는 곧 만나자는 인사를 했다.
남자친구를 배웅하러 잠깐 나갔다 왔더니 다시 열이 나는 듯했다. 두툼한 옷으로 갈아입고 보일러를 올린 후 소파에 들어 누었다. 티비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남자친구가 죽을 해준 게 고맙고 또 감동스러운 마음이 들어 부엌에 갔다가 그 옆 쓰레기통을 열어 보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쓰레기통 안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전복죽 그릇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아픈데 혼자라니 살짝 서글픈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새벽부터 깨 제주에 있는 병원을 찾아보고 다 죽어가는 나를 부축해 병원에 다녀와서는 또 밤새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편의점에서 전복죽까지 사와 데워 준, 남자친구의 홀로 벌인 분투가 눈앞에 그려져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한숨 푹 자고 나면 다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