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이 14. 혼자보단 둘이 좋다

22일째 날

by 하만다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남자친구와 나는 <우진해장국> 앞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곤 역시나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제주도 인기 맛집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도 식당 앞이 사람들로 가득한 걸 보니 살짝 기운이 빠져 버린 우리였다.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은 먹는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친구는 제주도에 오기 며칠 전부터 제주도 여행 첫 끼니로 우진 해장국부터 먹겠노라고 노래를 불러댔던 터라 상심이 더 커 보였다.


엄마와 이모들이 돌아간 후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며 기뻐하던 나는 또다시 손님을 맞이했는데, 바로 어젯밤 제주도에 도착한 남자친구다. 내가 제주도 한 달 살이를 계획한 직후 남자친구는 두 번의 제주 여행을 계획했었다. 한 번은 내가 제주도에 들어올 때, 다른 한 번은 삼일절 연휴가 낀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연휴를 앞둔 어제, 그가 제주에 왔다. 최근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 간 집에서 격리를 했던 남자친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디스크까지 터져 상당히 우울해했었다.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침대 위에 누워만 있으니 별의별 잡생각이 다 나고 회사 일부터 인간관계까지 회의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떨어져 있어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통화와 카톡으로 알게 된 남자친구의 기분은 대략 그러했다. 어쨌든 일상을 잠깐 떠나 제주도에서 오랜만에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같이 기분전환을 하기로 했다. 나도 다른 어떤 이가 제주도에 올 때보다 신이 났고 또 남자친구의 기분도 풀어주고 싶었다.


"이름 쓰고 나왔어. 들어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릴 것 같대."


발 빠르게 식당 안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나온 남자친구가 말했다. 이름도 써놨겠다, 식사를 하려면 한 시간가량 남았으니 주변이나 돌아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 시간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우진해장국> 앞


<우진해장국>은 제주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제주 시내 안에 있다 보니 여러 관광지와도 가까웠다. 제주도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게 되는 제주동문시장과 JTBC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소개된 제주목관아도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에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은 <D&DEPARTMENT>라는 상점이었다. 일본에서 시작한 이 상점은 일본 내 여러 지역에 그리고 국내에는 서울 이태원과 제주도에 위치하고 있는 아주 독특한 상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산된 물건 중 친환경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디자인적으로 아름다운 물품들을 선별해서 파는 곳으로 유명한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상품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식당과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쉬어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바람은 찼지만 햇빛은 따뜻해 걷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우리 둘은 주변의 건물들과 거리를 구경하며 <D&DEPARTMENT>로 향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20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은 상점 한쪽 벽면에 크게 적혀 있는 알파벳 'd'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도 빠질 수 없어 여러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을 수십 장 찍어댔다.


"왜 이렇게 살쪘지?"


찍은 사진을 보며 남자친구는 궁시렁댔다.


<D&DEPARTMENT> 입구 모습과 'd' 앞에서 찍은 사진


여러 화분들이 빼곡한 상점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식당이 나왔다. 1층 전체를 식당으로 쓰고 있어 공간이 넓었고 쾌적했다. 각종 음료와 디저트를 팔고 있어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커피를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해장국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는 식당을 슬쩍 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상점의 2층은 제주도에서 생산되고 만들어진 식품이나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의류와 인테리어 소품들, 난생처음 보는 공예품들까지 진열된 물품의 종류가 다양했다. 아쉽게도 꼭 살만한 제품은 발견하지 못해 1층 식당 앞 냉장고에 있던 제주도 청귤 요거트를 한 병 사고 혹시라도 늦을까 봐 서둘러 <우진해장국>으로 돌아갔다.


<D&DEPARTMENT> 내부와 상품들 중 일부

식당 앞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관광객들인지 여행 트렁크를 끌고 식당 앞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이 띄었다. 식당 안에 들어가 좀 전에 이름을 적었던 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아직 우리 차례가 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남자친구와 가게 앞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20분 정도 더 기다리니 이름이 불렸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


자리에 앉자마자 고사리육개장 두 그릇과 녹두빈대떡 하나를 주문했다. 빈대떡이 있는데 막걸리가 없을 수 없지, 기분이다! 막걸리도 한 병 주문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식당에 입성한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입은 싱글벙글 귀에 걸렸고 먼저 나온 먹걸리를 사발에 부어 건배를 했다.


"제주 여행을 위하여!"


다소 유치하지만 설레는 마음 가득한 건배를 하고 곧이어 나온 해장국을 한 입 떠먹으며 생각했다. '행복 별 거 없다! 이게 행복이지!'


해장국은 과연 명성다웠다. 보기에도 꾸덕한 갈색깔의 국물은 아주 진하고 싶은 맛이 났는데, 그 맛이 꼭 닭죽 같았다. 잘게 찢어진 닭고기와 고사리가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고명으로 올라간 파와 같이 씹는 맛이 아주 좋았다. 육개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곳의 고사리육개장이라면 매일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두빈대떡도 맛있었는데 고사리육개장에 비하면 평범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이런 평이 무색하게 두 장이나 부쳐 나온 빈대떡도 반 장 정도를 남기고 다 해치웠다.


고사리육개장과 녹두빈대떡 그리고 막걸리




배는 든든하게 채웠고 소화를 시킬 겸 제주 시내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먼저 간 곳은 <에브리바디 빈티지>라는 구제의류 가게였다. 어젯밤 남자친구 마중을 위해 공항에 가기 전 제주 시내를 구경했는데, 우연히 이 가게를 발견했었다. 쨍한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좁고 기다란 건물에, 크게 <Everybody vintaage SL.>라고 적힌 이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갔는데 가게 안에는 축구 유니폼과 머플러가 가득했다. 축구를 좋아하고 유니폼을 모으는 게 취미인 남자친구랑 오면 재밌을 것 같아 오늘 다시 들렀다.


자세히 둘러보니 가게 1층에는 축구 유니폼과 머플러, 축구화 등 축구 관련 구제 용품들이 있었고, 2층에는 셔츠와 맨투맨, 밀리터리 의류 등 남성 의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연예인 사인들도 붙어 있었는데, 효리 언니와 남편 이상순 씨의 사인이 있어 이유는 모르지만 반가웠다. 2층보다는 1층에 관심이 갔던 남자친구는 1층 진열된 유니폼을 하나하나 꼼꼼히 구경했는데, 축구는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활동을 끝으로 더 이상 관심이 없었던 나는 해외 축구는 더더욱 몰라 형형 색깔의 유니폼과 머플러를 보고서도 큰 감흥이 없었다. 남자친구는 그런 나를 붙잡고 이건 어디 거고 저건 어느 구단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내 눈엔 고놈이 고놈 같았다. 오래간만에 신이 난 남자친구에게 찬물 끼얹을 수 없어 나도 혹시 살만한 게 있을까 뒤적여 보았다.


<에브리바디빈티지 스페셜라운지> 외관과 효리언니, 이상순 씨의 사인


축구 유니폼, 머플러와 남성 구제 의류들


"그만 가자"


원하는 축구 유니폼이 없었는지 얼마 안 있어 남자친구가 나가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친구 손을 잡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근처의 빈티지샵을 몇 군데 더 구경한 후 <우무>라는 곳에서 푸딩을 샀다. 우뭇가사리로 만든 푸딩이라는데 만든 재료보다는 가게 캐릭터가 귀여워 더 끌리던 곳이었다. 커스터드푸딩과 초코 푸딩을 각각 하나씩 사서 동문시장으로 가 쉬어갈 만한 카페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우진해장국 먹겠다고 아침 일찍 나와 차례 기다리면서 한 시간, 식사 후에 쇼핑한다고 한 시간을 걸으니 앉아서 쉬고 싶었다. 다행히 시장 안에 카페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귀여운 <우무> 로고


<자키커피>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동문시장 안에 위치해 있는데, 간판도 없어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법한 곳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전체적인 인테리어가 벽부터 천장까지 모두 우드톤으로 통일되어 있어 그런지 원래도 좁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더욱 넓게 느껴졌다. 의자와 테이블 이외에 화분 한 개, 액자도 두세 개만 걸려 있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분위기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만들고 내오는 공간은 호텔 리셉션 같기도 하고 위스키 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레몬차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이 집만의 시그니처라는 호랑이 쿠키를 주문했다. 차와 커피 맛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제주 시내 구경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충전시키기에는 충분했고, 특히 호랑이 쿠키는 커다란 초콜릿과 견과류가 양껏 들어가 있는 데다가 크기도 크고 두툼해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시장 속 한적한 카페에 앉아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마시면서 우리 둘은 그간 만나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었다.


<자키커피> 내부


<자키커피>에서 팔고 있는 쿠키들


우리가 주문한 음료와 쿠키




나름 알찼던 제주 시내 구경을 마치고 다시 세화로 돌아왔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주 시내에서 멀지 않은 것 같은 세화도 버스를 타면 한 시간이 꼬박 걸린다. 집에 돌아와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세화에 있는 흑돼지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남자친구가 제주에 와있는 5박 6일간의 일정의 모든 삼시 세끼는 전부 계획되어 있었다. 계획의 주체는 당연히 내가 아닌 남자친구. 남자친구가 먹고 싶은 음식과 가고 싶은 음식점은 5박 6일간의 일정으로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고르고 골라 일정 내내 꽉꽉 채워 넣었다. 덕분에 나 혼자서는 먹기 힘들거나 혼자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음식들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나 역시 기대되었다.


우리가 간 음식점은 이름부터 기대하게 되는 <한라산도야지>라는 곳이었다. 흑돼지 생고기를 파는 곳이었는데 오겹살과 생갈비를 주문해 먹었다. 기대한 것보다는 다소 평범한 맛에 살짝 실망했지만 역시나 남김없이 싹싹 먹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세화해변 근처에 있는 <한라산도야지>, 맛은 평범하다
평범했지만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며 만세를 외치던 것도 잠시, 다시 맞이한 손님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설레고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가 되었다.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다며 아무도 알 수 없는 변덕을 부리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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