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째 날
텔레비전 소리, 엄마와 이모들이 수다 떠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집이 오늘 아침은 고요했다.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다가 엄마와 이모들이 5박 6일 일정을 마치고 어제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곤 침대에 누워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회사에 3개월 병가를 내고 복잡한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서 힐링을 해보겠다는 딸과 조카를 기어이 쫓아 제주도까지 온 엄마와 이모들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엊그제 대학원 졸업식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모들과 함덕 해수욕장부터 산방산 유채꽃 투어, 돌문화공원까지 다녀왔을 땐 왜 제주에 오겠다는 엄마와 이모들을 거절하지 못했는지 자책했었다. '으이구, 내가 미쳤지'하고 말이다. 길고 길었던 제주 여행을 마친 어제, 공항에 배웅 나간 내게 이모들은 탑승 수속장으로 들어가기 전 "네 덕분에 아주 편하게 쉬고 간다, 너무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 '좀 더 잘해줄 걸 그랬나'하고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것도 잠시, 고요한 아침을 나 홀로 맞이해 보니 역시 혼자가 좋다 싶다. 엄마, 이모들 미안.
잃어버린 루틴을 다시 시작해볼까 싶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조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엔 구름이 껴있었고 바람이 불긴 했지만 강하지 않았다. 햇빛도 따스했다. 어제까진 그렇게 매섭게 불어대더니 오늘은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바람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모가 가져온 우산이 태풍 못지않은 바람 탓에 뒤집어지는 걸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게 여러 번이었다. 얼마 전 미선이가 왔던 날도 흐렸고 말이다. 그렇게 제주 날씨를 얄미워하며 세화 해변을 따라 달렸다. 하얀 등대를 돌아 나오는데 멀리서부터 보이던 트럭이 점점 가까워졌다. 트럭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 쪽에서 해변도로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가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열린 창문으로 아저씨는 외쳤다. "더 열심히 뛰어, 더 열심히!" 60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 장난스러운 표정과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알겠다구요!" 원래 알고 다니는 동네 아저씨한테 말하는 것 마냥 나 역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날씨가 좋긴 했지만 하늘엔 구름이 껴있고 바람도 불었다. 멀리 나가기에는 부담스러워 동네에 남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조깅할 때마다 보게 되는, 그래서 궁금했던 카페가 하나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해녀박물관을 마주 보고 왼쪽으로 돌아 쭉 달리다 보면 얼마 안 가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곳이 있다. 그렇다. 내가 제주도에 온 지 며칠 안 되어 까불다 넘어졌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곳에서 낮은 돌담 너머로 해변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다. 이름은 <미엘 드 세화>. 간판 위 살짝 녹이 슨 부분이 있지만 외관은 새하얀데, 내부는 우드톤의 테이블과 의자, 노란색, 분홍색의 벽지, 곳곳에 놓여있는 꽃들과 화분들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한쪽 벽면에 놓인 조그마한 책꽂이에는 책과 잡지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살짝 보니 내 취향인 책들이 많아 다음에 다시 한번 와 책을 몽땅 읽고 가야겠다 싶었다.
메뉴판을 보다가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아 딸기 라테를 주문했다. 딸기 케이크도 맛있어 보여 같이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딸기 철이 아닌가. 기대감을 가지고 결제를 하려는데 사장님이 조금 무뚝뚝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표정도 하나 없이 주문을 받는 사장님을 보면서 나는 묘하게 이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멋진 바다를 보면서도 아무 표정이 없다니 하고 말이다. '여행도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즐겁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과, 동시에 '노동은 인간의 원죄'라고 말한 상사의 말도 떠올랐다. 조금 뒤 맛본 딸기라테와 케이크가 정말 맛있어서 그 이질감이 더했다. '무뚝뚝한 사장님과 달콤한 디저트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케이크의 달콤한 맛에 그 생각은 빠르게 잊혔다.
라테와 케이크는 올해 들어 먹었던 딸기 디저트 중에 제일 맛있었다.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을 구경하다 태블릿 PC를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달달한 디저트를 먹어 당이 쭈욱 올라와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글이 잘 써졌다. 타자 치는 속도가 굉장했는데 이대로라면 유튜버에 이어 작가로 데뷔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케이크가 커피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글을 쓰다 해가 지기 전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