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불만을 받아들이는 자세

야구장 아르바이트

by 만달
바둑은 집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에요.
그래서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잘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_ 더글로리, 넷플릭스, 2023

어려서부터 스포츠 경기 관람을 좋아했다. 스포츠는 규칙 안에서 경기의 흐름과 분위기를 가져오면서 상대방을 흔들어놓는다. 침묵 속에서 치열하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너무나 조용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언니는 수업이 늦게 끝났으므로 집에 오면 항상 혼자였다. 그 적막이 어색해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 잔잔한 소음을 바탕으로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부모님이 반대를 안 할 수밖에!) 가장 즐겨봤던 채널은 바로 스포츠 채널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프로야구를, 야외활동이 어려운 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봄까지는 프로농구를 관람했다. 야구에서 베이스에 주자가 채워지거나 농구에서 갑자기 점수 차가 줄어들 때, 긴장감이 생기면 텔레비전 속 화면에 집중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스포츠는 나의 외로움을 달래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경기를 관람하지 못했던 건,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태어나고 자랐던 도시를 떠나 드디어 야구장과 농구장이 가까워졌다.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야구장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경기가 보이는 곳에 배치를 받는다면 공짜로 경기를 관람할 수 있고, 단기로도 가능한 아르바이트여서 여행 일정을 계획하기에도 좋았다.


하는 일

경기 시작 5시간 전 : 집합

경기 시작 3시간 전 : 근무 시작, 유니폼 착용 및 근무 위치 배정

경기 시작 2시간 전 : 관객 입장 시작

경기 시작

경기 끝 : 유니폼 반납 후 귀가


경기장 외부

관객들을 맞이하면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검표와 소지품 검사.

검표는 표의 소지 여부뿐만 아니라 중앙 테이블석, 야외석, 1루석, 3루석, 위치에 맞게 입장을 하는지 확인을 하는 예상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소지품 검사. 이게 재미있는데, 별의별 이야기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루이틀 경기 수가 쌓이면서 각자의 경험담을 듣다 보면 아주 가관이다. 소지품 검사의 목적은 '안전'이다. 테러 등의 위협에서 보호하는 것도 있지만 거의 없는 경우이고, 주로 유리병과 술을 검사한다. 간혹 선수들에게 병을 던지는 경우가 있어 (진짜다) 유리병 반입을 금지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싶겠지만 만루에서 병살타가 나오는 상황, 만취한 관객들이 종종 그러기도 했다. 그래서 알코올 농도 5% 이상의 술도 반입 금지다. 다시 말해, 캔맥주는 되지만 병맥주나 소주, 그 이상의 독한 술은 입구에 잠시 ‘맡아’ 둔다.


소주를 발견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몰라서 가져온 경우다. 가방을 열자마자 보이는 초록색 유리병들은 설명과 함께 입구에 보관된다. 가끔 '유리병 반입 금지'는 알지만 '소주 반입 금지'는 모르는 분들이 종이팩 소주를 가져오시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회식을 하시는지 종이팩 소주를 궤짝으로 들고 오신 경우가 있었다. 나름 정보를 찾아보신 노력은 가상했지만 사무실에 보관해 뒀다가 경기가 끝나고 돌려드렸다.


이 정도는 귀엽고, 알면서도 숨겨서 들어가려다 들키는 경우도 많다. 우선 생수병에 옮겨서 담아 오는 경우. 살짝 흔들었을 때 뽀글뽀글 회오리치며 올라오는 잔기포를 눈앞에 들이대도 물이라고 우긴다. 압수. 텀블러나 맥주 페트병, 심지어는 아기 젖병에 옮겨 담아 오는 경우도 전해 들었다. 해당 경우는 게이트에서는 파악하기 힘들고, 경기장 내부에서 음식과 주류를 하나둘 꺼내며 한잔하다가 발견된다. 바로 압수.


경기가 시작해도 3이닝 정도까지, 즉 1시간 정도 계속 입장을 한다. 4이닝쯤 되면 게이트에서 할 일은 줄어든다. 가끔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표를 확인하면 된다.


경기장 내부

관객이 입장을 하고 나면 경기장 안의 관객석에 배치된 인원들이 역할을 한다. 들어갈 때 표를 검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야구장은 좌석 별로 티켓 가격이 달라서 지정된 구역에서 표를 확인하고 우회하는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파울볼이나 홈런 등 경기장을 넘어 공이 날아올 때면 호루라기를 불어서 치맥을 하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것도 하는 일의 일부였다.


그리고 게이트에서 검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소주를 들여오는 불굴의 한국인들이 있다. 경기 후반이 되면 얼굴이 벌게지고 혀가 꼬이는 관객들이 하나둘 보이는데, 그럴 땐 보안팀을 불러 경기장 밖으로 에스코트를 해드린다.

그리고 대부분은 경기 관람을 했다! 꿀!


구직과 일당

(팩트 체크가 된 것은 아님을 참고하길 바란다.)

구장(대기업)에서 아웃소싱 업체와 계약을 하고, 해당 업체에서 알바몬이나 알바천국 같은 구인 사이트에 광고를 낸다. 즉, 야구장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대기업 소속이 아닌 인력 담당 업체와 일일 아르바이트 계약을 하게 된다.


시급이 아닌 일당으로 계산되었다. 경기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야구 게임의 특성상 게임 진행 시간을 3시간 30분으로 가정하고, 사전 준비 시간을 2시간으로 계산해서 총 5시간 30분에 해당하는 하루 일당을 받았다. 즉, 경기가 빨리 끝날수록 이득, 잔루가 많을수록 귀가가 늦어졌다. (아르바이트를 계기로 홈런과 안타를 빵빵치는 타자보다 경기 운영을 잘하는 투수와 수비를 잘하는 선수를 더욱 좋아한다.)


여기서 잠깐. 집합 시각은 경기 시작 5시간 전이었지만, 근무 시간으로 인정되는 건 경기 시작 2시간부터. 즉, 3시간은 무급 대기 시간이었다. 불특정 다수가 일하는 근무지 특성상 무단결근이나 지각이 빈번해서 인원 파악과 충원을 위해 일찍 오라는 취지였지만, 8시간 넘게 근무지에 있으면서 일당은 5시간 30분에 해당하는 일당을 받았다. 무료 경기 관람도 한두 번이지, 시간을 현명하게 쓰고 내 돈 주고 야구 경기를 보러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인생 첫 진상

하루는 입구에서 검표와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1이닝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한 관객이 손에 표를 쥐고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표와 가방을 검사하는 동안 대뜸 경기장이 왜 이렇게 크냐며 화를 냈다. 격분해서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고성에서 정리를 해보면, 좌석의 위치마다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가 다른데, 몇몇 게이트에서 입장 거절을 당하고 결국 경기장 한 바퀴 전체를 돌아야 했고, (힘들어 죽겠는데) 경기장 안내가 불충분하다며 영문도 모르는 직원들에게 대뜸 화부터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바탕 분통을 터트리고는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경기장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나와서 나를 콕 집어 불렀다. 당시 진상에 대한 경험치가 너무나 부족한 상태여서 표정 관리를 못했었다. '본인이 표지판을 못 보고 반대로 돌아가놓고 그거 좀 걸었다고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뭐 저런 사람이 있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표정으로 다 드러났었나 보다. 시속 140km로 공을 던지고 열심히 베이스 위를 달리는 선수들보다 나의 아니꼬운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는지 경기를 관람하다가 다시 게이트로 와서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표정 관리는 물론, 힘들고 짜증이 난 감정을 공감해 주는 척이라도 하며 달래줄 테지만, 당시엔 일말의 감정적인 동요도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대꾸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게 화를 더 돋웠는지 관리자까지 호출하고는 그에게서라도 ‘죄송하다’라는 말을 들어냈다.

아, 저 말이 듣고 싶었던 거구나.


이후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했다. 그럴 때면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하곤 한다. 흔히 말하는 '갑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제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가정이든 회사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혹은 스스로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 이들의 자격지심으로 보여 안타깝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과 정당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다르므로.


시간이 더 흘러 회사에 입사해 B2B 프로젝트를 하면서 개인이 아닌 회사라는 고객이 생겼다. 고객의 불만을 수없이 마주하고 해결하면서 야구장 아르바이트가 생각나기도 했다. 당시 야구장의 서비스 제공은 최선이었을까? 표지판의 수가 충분했을까? 위치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 적절했을까? 표지판의 UI는 직관적이었을까?


고객의 불만은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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