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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I Nov 30. 2019

30분 동안 달리며 관람하는 노을 쇼

2019.11.16 / 5.04k

10월에는 이래저래 바쁘게 시간이 지나갔다. 핑크런 마라톤을 뛰고 나니 주말마다 이런저런 일이 생겨 달리지 못했다. 사실 짬을 내면 달릴 수도 있었겠지만 바쁜 주말은 바쁜 대로, 여유로운 주말은 여유로운 대로, 가을빛을 즐기며 보내버렸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토요일이었다. 따로 약속은 없지만 해야 할 일 들을 머릿속에 줄을 세워 하나씩 하다가, 문득 날씨가 좋으니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갑자기 일정을 하나 더 추가해버렸다. 달려서 합정까지 갔다가 커피콩 사 오기.

뭘 해야지 하고 계획을 세울 때 정확한 시간을 정해두지는 않고 대략 이때쯤?이라고 느슨한 바운더리를 두는 편이다. 생각보다 일찍 하게 되면 여유롭게 다음 일정으로 넘어갈 수 있고, 시간이 지나더라도 마음 조이는 긴장감은 덜하니깐. 오랜만에 미국에서 한국에 놀러 온 친구가 아가를 가졌다는 소식에 작은 선물을 만들어볼까 하고 만들던 중이었다. 5시 반쯤 해가 질 거 같으니 그때까지 바느질을 마무리해보자고 생각하고 천천히 미싱을 돌린다. 다행히 달리기 하러 나가야지 했던 시간 전에 아기 턱받이가 완성되었다.

가을이 되니 오후 볕이 뜨거워지다가 해가 금방 져버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해가 지면 달리기에는 온도가 확 떨어지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달리기를 하려고 부지런히 홍제천으로 향한다. 아직 주변은 밝고,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도 꽤나 많아 보인다. 해가 지기 시작하니까 공기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가서인지, 미처 오후의 볕에 온도가 식지 않은 강물과의 온도차가 생겨서 물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적당히 몽환적인 느낌이 들어 달리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홍제천과 불광천이 만나는 지점을 지나 한강에 도착하니 빛 느낌이 심상치가 않다. 분홍빛과 주황빛 중간의 빛이 한강에 비쳐서 너울너울. 오른쪽에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풍경이 좋은 날엔 고개를 오른쪽으로 고정하고 뛴다) 그 오묘한 빛색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우와 너무 예뻐”라고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달리기가 좋은 점 중에 하나는 이런 게 아닐까. 기대도 하지 않았던 풍경을 달리기 중에 만날 수 있다는 것. 해가 지는 그 찰나의 짧은 30분을 배경을 달리해가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홍제천 고가도로 교각 사이로 조각조각 보이던 지는 해가, 한강에서는 월드컵 대교를 배경으로 엄청난 빛의 색을 보여주다가, 성산대교 밑에서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피사체로 만들어 역광의 근사한 배경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5k 달리기를 하는 30분 동안 일어나고, 금방 끝이 난다. 사무실 안에서는 하늘이 어떤 색으로 변하는지 느끼기도 전에 어두워진 하늘로 바뀐 것만 겨우 알아챈다면, 달리기 하는 동안에는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노을 쇼를 완전히 관람할 수 있다. 성산대교 밑 오묘한 물색을 마지막으로 노을 쇼는 끝이 나고, 합정역에 오니 어느새 깜깜한 하늘 밑 국회의사당이 번쩍번쩍 존재감을 드러낸다.

분명히 시작할 땐 사방이 환한 오후였는데, 달리고 나니 밤이다. 달리기 글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단골 커피집 커피 발전소에 들러 바나나 스무디를 마시고, 책상에 놓여있던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책을 좀 읽다가 커피콩을 사서 돌아왔다. 혼자 달리기를 하다 보면 달리기를 시작하는 시간도, 마치는 시간도 내 맘대로 정하고는 이후의 일정도 이렇게 저렇게 바꿔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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