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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Feb 12. 2023

말하지 않는 비밀

영화 《페어웰》

《페어웰》(The Farewell, 2019)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에 사는 ‘할머니’(자오 슈젠)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남은 시간은 3개월. 세상과 작별을 앞둔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족들이 ‘건강에 문제가 없다’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화의 바탕이 된 거짓말이다. 한편 가족들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손자의) 가짜 결혼식을 계획한다. 미국과 일본에서 살던 가족이 중국으로 모이고, 모두가 할머니를 위한 ‘작별 연극’에 동참한다. 뉴욕에서 온 손녀 ‘빌리’(아콰피나)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가족들의 계획에 수긍한 건 아니었다. ‘도대체 왜 할머니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는 거지?’ 그는 환자를 속이는 문화가 놀랍기만 하다.


중국에서는 병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병에 걸렸다는 사실(공포)이 사람을 죽인다는 가족의 설득에도 빌리는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가족의 의지를 무시한 채 할머니에게 진실을 전할 수도 없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비밀 공동체. 그 일원이 되어 할머니의 마지막 나날을 함께하게 된다. 나 역시 그의 가족이 한 선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실을 안 할머니가 받게 될 슬픔과 충격을 가족이 대신 나누어 짊어진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이긴 한가. 내가 아파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가족이 아플 때도 그렇다. 당신이 아파서,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내 입술에 머금고 산다면 내 눈은 무엇을 바라봐도 고통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거짓말 앞에서 의문이 쏟아진다.


의료법은 모르지만, 진단 결과를 당사자에게 숨겨도 되는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한 것 아닌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권리는 보장해야 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거짓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영화의 주제는 아니었다. 결말로 가보자. 거짓말에 기반한 이 영화는 결국 제목마저 배신한다. 수년이 흐른 뒤에도 할머니는 세상과 작별하지 않았다. 영화 속 거짓말(할머니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것)이 결과로써 진실이 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안도하며 이렇게 판단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공존이구나’. 돌아보니 그렇다. 빌리의 가족에게 거짓말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할머니와의 오롯한 작별. 다만 할머니가 슬프지 않게. 함께. 그러므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치관)가 달라도 공존할 수 있다.’ 어떻게? 공동 목적(할머니와 오롯한 작별)이 있다면. 즉, 다른 형식의 사랑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영화의 목적이 더 선명해졌다. 룰루 왕 감독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두 국가의 문화적 차이를 경험한 인물이며, 다른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존중이 곧 공존의 시작이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영화는 인물에 관한 판단과 평가를 보류한다. 그들의 표정에 집중한다. 문화적 차이를 맞닥뜨린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다. 더해, ‘이 방식이 옳다’ 같은, 완성된 메시지를 전달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문화(혹은 가치관) 충돌 속 공존의 사례 중 하나를 보여줄 뿐. 재미있는 사실은 충돌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점 아닐까.

      

인간은 모두 다르다. 한솥밥 먹는 식구라도 그렇다. 다름을 인정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멀어지는 듯하다. 외려 더 많은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언제든, 누구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충돌 앞의 우리가 공존하려면 서로에게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는지도 모른다. 소중하고 가까운 관계일수록 거의 말하지 않은 비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진실’. 진부해도 어쩌겠는가. 사랑만큼, 완벽한 이해도 절대적 양보도 없이 사람을 잇는 이음매가 없는 것을. 공존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며,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는 온전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때로 빌리처럼 상대가 이해되지 않을 때 한 걸음 물러서는 지혜도 필요할 테다. 다만 매 순간 기억해야 할 것. 상대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


               

(2023. 02. 12.)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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