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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ul 03. 2023

자각 없는 구원의 눈송이

문진영 소설 《딩》

 기년 전 어딘가에 이런 문장을 쓴 적 있다. “가장 좋은 위로는 이어달리기다. 내가 받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면 된다.” 단언하듯 썼으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겪어보니 그랬다. 인간이 인간을 일으키는 일은 의지의 실행이 아니라 우연한 사고에 더 가까웠다. 원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원한 적 없이도 때때로 일어나는. 말하자면 불가항력의 일.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선한 의지를 마냥 무력하게만 여길 수는 없으리라. 타인 또는 세상에 대한 사소한 애정과 호의. 그것 없이 ‘위로라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섣부르고 이르지만, 이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딩》(문진영, 현대문학, 2023)에는 자각 없이 서로를 구원하는 인물이 나온다. 가상의 바닷가 마을 ‘K마을.’ 그곳에 “밀린 숙제를 하러”(10쪽) 돌아온 ‘지원’은 등대 층계참에서 발견한 작은 귤 하나에 “느닷없이 마음이 환해”(38쪽)진다. 이윽고 ‘주미’에게 연락한다. “나왔어.”(61쪽) 단 세 글자에 주미는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기쁨”(62쪽)을 느낀다. 기쁨은 변화로 이어진다. 주미는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72쪽) 그런 주미 역시 지원처럼 타인을 일으킨 적 있었다.     


 수혜자는 “행복에 겨워 방심하고 또 방심”(122~123쪽)하다 딸을 잃은 ‘영식’이다. 간신히 삶의 의지를 붙잡은 그는 포장마차를 운영한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도 ‘타인을 구원하는 우연’이 일어난다. 첫 번째 대상은 재인이다. 애인 P가 태어나고 죽은 나라에 온 재인은 P가 스스로 목숨 끊은 모텔방에 장기 투숙한다. 알고 싶어서다. “휴대폰 화면 속 P가 재인을 향해 왜 그렇게 환하게 웃었는지. 왜 재인이 한국에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 건지. 왜 하필 다른 곳이 아니라 거기였는지.”(88쪽) 재인이 답을 찾으려는 동안 영식은 허기를 달래주는 방식으로 그를 위무한다.     


 “세상에서 가장 누추한 왕국. 하지만 막상 이 왕국에 초대되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음.”(100쪽) 영식의 포장마차에 대한 재인의 설명이다. 낯선 왕국에서 속을 채우며 조금씩 회복하는 재인과 달리, ‘쑤언’은 외딴 나라(한국)에서 일하다 동료를 잃는다. 오갈 데 없는 그에게 영식은 방을 내어준다. 그 덕에 쑤언은 따뜻하고 맛있는 겨울을 보낸다. 어느 날엔 계단 층계참에 귤을 올려둔다. 그것이 누군가(지원)를 위로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다섯 사람은 서로를 구원한다. 마치 눈처럼, 지상에 닿아 함께 스미는 눈송이처럼. 각각 고유하게 존재하되, 끝내 뒤섞여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처럼.     


 소설 제목 ‘딩(Ding)’은 보드가 무언가에 부딪혀 난 상처를 뜻한다. P가 지은 동아리 이름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지었냐는 재인의 물음에 P가 말한다.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85~86쪽) 바다 밖 인생에도 저마다 ‘딩’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한 상처받음은 불가피하니까. 여기서도 ‘상처’는 고통의 흔적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상처받은 채로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큰 뜻이나 의미 없이 서로에게 건네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구원의 말과 몸짓. 그런 사고의 조짐들.     


 소설은 극복이나 치유를 운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읽는 동안 기분이 나아지고 맑아졌다.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105쪽) 호소도 분노도 가르침도 없이, 그저 마음에 녹아 스미는 소설을 겪으며 “파도 타듯 위태롭게 흔들릴 뿐인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152쪽)을 느꼈다. 따뜻한 소설은 흔하지만 차가운 눈송이로 마음을 “데펴” 주는 소설은 처음이라 그런가. ‘K마을’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면 상처 입은 채로 살다가도 불현듯 웃게 될 줄 알아서. 갈 수 없으니 기도라도 해본다. “떠나는 이들에게서는 깊은 안식을. 남은 이들에게는 폭설을 견딜 힘을 주시길.”(같은 쪽)



(2023. 07. 03.)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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