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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Oct 26. 2023

모국어를 쓴다는 것

아고타 크리스토프 소설 《문맹》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한 소설에 적힌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 속 ‘나’는 어째서 그러한 도전을 하게 되었나. 이전 내용을 읽어보자.

     

11월의 어느 저녁, 우리는 ‘월경 안내인’을 뒤따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넘는다. (···) “우리는 난민입니다.” (···) 스위스에 도착하고 5년 후, 나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지만 읽지는 못한다. 나는 다시 문맹이 되었다.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던 내가 말이다.

     

보충하자면 ‘나’는 전쟁, 독재, 점령이 반복된 헝가리의 정세에 휘말려 (게다가 남편이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국경을 넘은 난민이다. 그로 인해 모국어를 잃지만, 글쓰기에 관한 열망은 잃지 않는다.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의 한 도시에 정착 ‘나’는 사전과 사랑에 빠질 만큼 노력한 끝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발표한다. 이후 《Le Grand Cahier》(1986)를 펴내며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더 흐른 2004년,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소설을 펴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 글에 인용한 《문맹》(L'analphabète, 백수린 역, 한겨레출판, 2018)이다.

     

이 책은 소설로 분류돼 있으나 ‘자전적 이야기’라는 부제대로 논픽션에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문맹이 돼버린 ‘나’의 사정은 전부 저자의 체험이다. 그처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작품을 발표한 사례를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나 사뮈엘 베케트를 비롯한 몇몇 이름을 떠올릴 분들이 많으리라. 크리스토프 역시 그 이름들과 마찬가지로 ‘문맹의 도전’을 넘어 문학적 성취를 이룬 이주민 중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을 성공담으로 읽기란 어려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슬픔과 미련이 느껴지는 가정이다. 언어와 문화를 잃은 비애는 안전과 기회가 보장된 세계로 이주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무리한 짐작은 아닐 테다. 실제로 저자는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말한다. “그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또는 민족에 관해 생각해 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아는 바 없지만, 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본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모국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영혼의 언어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그저 말이나 글이 아니라 한 세계의 문화와 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국어를 잃는다는 것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영혼의 허기에 시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나’와 비슷한 경험을 덧대어 이 글을 마무리하면 좋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모국어를 잃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외국어조차 아주 가끔 쓴다. 요컨대 외국 회사에 서비스 해지를 요청하기 위해 이메일을 보낼 때. 그조차 번역기에 의존하는데, 자꾸만 아득해진다. ‘그냥 취소 말고 환급’이라는 내 의사가 정확히 반영됐는지 믿지 못해서다. 단어를 여러 번 검색하고야 전송 버튼을 누른다. 그럴 때마다 매번 느낀다. 내 나라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나 역시 문맹이 되리라는 것을.


어느덧 시월도 저물어 간다. 한글날은 지나갔지만, 한글을 쓰는 날은 이어지고 있다. 내 나라말을, 모국어를 쓰는 일이 명백한 행운이라는 진실을 이즈음 말해 보고 싶었다. 그러려고 시월이 가기 전에 이 글을 쓴다. 영혼의 언어에 겨울이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어떤 세상에든. 더는. 


(2023. 10. 24.)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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