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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Nov 03. 2023

소설의 어떤 최선

문진영 소설집 《최소한의 최선》

한동안 나의 겨울 소설은 〈입동〉*이었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 시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설을 떠올리며 환절을 맞았다. 매번 읽은 건 아니다. 몇 번은 책을 펼쳤고, 몇 번은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여러 해의 겨울을 그렇게 시작하다가 올해 초여름, 《딩》(문진영, 현대문학, 2023)을 읽은 후 입동의 책이 갱신되었다. 따뜻하나 데지 않을 군불 같은 소설에 확실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겨울마다 읽기로 계획한 거였다. 그랬던 것이 최근 출간된 동 저자의 단편집 《최소한의 최선》(문학동네, 2023)을 만난 뒤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 말해볼 수 있게 되었다. 거칠게 요약하면 소설 속 대상과 그 대상을 비추는 태도가 이유인 듯한데,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좀처럼 조명되지 않는 인물을 비춘다는 점에서. 세상은 가장 높은 곳과 제일 놀라운 일을 주로 비추고, 그 빛은 곧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다. 이때 화두의 뒤편은 어둡다. 일테면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 놀라운 것 없는 평범한 대다수가 사는 곳. 그런 곳엔 빛의 그림자가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범이란 정말 존재하는가. 비범을 위한 반의어 또는 배경에 가까운 말 아닌가. 의심하다가도 그대로 둔다. 우리를 말하는 다른 이름을 모르므로, 다만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므로. 그러자 세상의 빛은 안심한 듯 멀어진다. 높거나 놀랍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반문한다.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하잖아. 다 그렇게 산다고.”(218쪽) 사느라 침묵하는 이들이 사는 곳. 문진영의 소설은 바로 그곳을 비춘다.

     

둘째. 존중의 빛이라는 점에서. 그 빛은 인물과 세상을 살갑게 껴안거나 건조하게 관조하지 않는다. 다만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일테면 이렇게.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고충이 있겠지.”(166쪽) 또 어딜 가나 반짝이는 사람 옆에 선 인물들(〈미노리와 테츠〉)을 살피며 그들이 밀려난 게 아니라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30쪽)이라고 말한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엄마와 그것에 공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딸(〈오! 상그리아〉)과 자기 선택을 끝내 긍정하지 못하는 인물(〈한낮의 빛〉)에게도 그런다. 그들이 선택하거나 받아들인 각자의 방식을 평가하거나 변화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저마다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염오하지 않는다. 다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책에는 과로사로 남편을 잃은 사람(〈변산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린 퇴사자와 퇴사를 선망하는 사람(〈지나가는 바람〉), 취업과 공시에 실패한 사람(〈고래사냥〉)도 나온다. 그들은 불행한 사건을 겪었고,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그래서, 그대로 끝인가? 상실과 좌절을 겪으면 인생이 멈추던가? 그렇지 않다. 어둠 안에서 살아간다. 마음 한편에 분명한 어둠이 있더라도. 아니, 있으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명한 나날을 보낸다. 소설은 가만히 그것을 비춘다. 빈틈을 서성이는 한 조각 겨울 햇빛처럼. 바로 이런 것. 완전한 극복 없이도 계속 살아가는 것. 그러나 또는 그래서 읽는 이가 소설 속 인물과 읽는 자신을 응원하게 되는 것.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덜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소설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2023. 11. 02.)

(@dltoqur__)


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23년 10월 25일 출간

     


*《바깥은 여름》(김애란, 문학동네, 2017)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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