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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Feb 05. 2019

사람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살피는 일

폴 오스터 소설 《빵 굽는 타자기》의 원래 제목은 《Hand to Mouth》다. 손에서 입으로 바로 건너가는, 근근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산다는 뜻이다. 《빵 굽는 타자기》를 처음 읽을 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책을 덮자마자 중고나라에서 수동 타자기 한 대를 샀다.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와 월세를 충당하던 ‘핸드 투 마우스’ 시기였으니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모델명은 마라톤 1000DLX. 햇볕을 받아도 전혀 반짝이지 않을 정도로 건조해 보이는 가난한 파란색이었다.

타자기를 칠 때 타이프바typebar가 종이를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때의 나는 뭔가를 무작정 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하찮은 내 하루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옮겨 칠 문장이란 게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타다다닥 쳤더니 마치 내가 그 문장의 소유주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작가가 된 마냥 최면에 걸리는 순간이었다.


배 깔고 누워서 타자기 칠 때가 좋았지...



결국 작가는 못 됐고 기자가 되어 타자기 대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 키보드 소리란 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조용한 공간에서 들으면 굉장하다. 뉴스를 볼 때 중요한 발표를 하는 순간에 일이백 명의 기자들이 무더기로 타이핑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마이크 너머의 배경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라. 그러면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닥 하는 소리가 빗줄기가 창 두드리듯 타타타타타타닥 쉴 새 없이 들린다.


사실 자판을 때린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자판 치는 힘으로는 나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대학교 때 타자기를 쳐댄 내공 덕분일지도? 타다닥 소리가 커서 가끔 기자실의 민폐가 되기도 한다. 열받을 때도 손가락은 늘 노트북을 때리고 있다. 기사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 머리보다 앞서 움직이는 손가락. 누구는 이 손가락으로 문학작품을 쓰고 고결한 피아노 선율을 만들어내지만 기자의 이런 요란한 노트북 소리는 확실히 핸드 투 마우스에 가깝다.

하루하루 뭔가를 써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적당하고 뻔한 결론 대신, 가치 있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꽤 긴 과정이 필요하다. 명쾌한 결론은 순간 그럴듯해 보이지만 본질 언저리까지 접근한 기사는 아니다. 좋은 기사를 매일매일 쓴다? 자판기에 사백 원 넣고 휘핑크림 얹힌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기대하는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다.

서글프다. 신문은 지면 수가 광고와 연결돼 있어서 늘어만 가고, 방송사에서는 아예 종일 특보 체제로 돌아가고 있다. (헉!) 그래서 일단 뭔 일이 생기면 타다다다닥 받아쓰기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인가. 기자는 인터넷에 올릴 기사도 수시로 써야 한다(헉헉!). 최근에는 현장에서 동영상까지 찍어서 보내라고 하고, 틈틈이 기자 블로그까지 운영하라고 한다(헉헉헉!). 이래저래 점점 더 질 나쁜 기사를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언론도 서비스 업종의 하나일 뿐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한 기자 선배를 라자냐가 맛있는 안국역 로씨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선배도 최근 기자를 그만뒀다. 퇴사로 치면 내가 선배지 않느냐며 기어이 한 끼 쏘라고 해서 만난 자리였다. 불투명해진 우리의 앞날을 대충 걱정하며 모호한 희망을 열렬하게 격려했다. 우리 일이란 게 얼마나 진절머리 났었나 하는 푸념을 늘어놓다가 대화 끝머리에 문득 선배가 말했다.

“그래도 막상 기자를 그만두니까 아쉽더라.”

“왜요?”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한정된다는 게.”    

     

13년을 기자로 일한 선배는 그간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며 참 많이 배웠다고 했다. 평생의 역작들이 화재로 모두 탔을 때 잿더미 앞에서 껄껄껄 웃으며 “붓부터 사야겠다.”고 말한 노화백을 취재하면서 인생을 산다는 건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를 인터뷰하며 기자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고 숨 막혔고 셀 수 없는 내상을 입었지만 10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지. 기자란 직업이 날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상을 가까이서 살피는 일만은 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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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이 포함된 에세이는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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