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질문: 러시아에 벚나무가 있던가? 게다가 동산을 이루고 있다고? 그런데 봄에 한국이나 일본으로 꽃놀이 가는 사람은 봤어도 러시아로 꽃놀이 가는 사람은 못 봤는데??
원제를 좀 찾아보니 사실 러시아어로 이 소설의 제목에서 의미하는 식물은 ‘버찌나무’로, 우리가 아는 봄의 꽃놀이하는 벚꽃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을유문화사 2025년 10쇄로, 이미 '벚나무 동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출판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벚꽃'과 체호프가 말하는 '벚나무 동산'의 상징성을 다르다는 걸 이미 역자과 편집자들이 신경 쓰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미지, 기억, 선입견, 경험으로 인해 어떤 단어를 이해할 때 작가가 하려고 했던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봄의 벚꽃의 느낌과는 매우 다르게 이 책에서 버찌나무 동산은 허울만 좋은 지주의 ’ 부동산‘으로, 꽃은 아름답게 피지만 과일엔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요즘 말로 하면 '예쁜 쓰레기'와 같은 그런 장소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 부동산 푸어‘라는 말이 있듯 주인공인 여지주, 라네프스카야는 러시아판 부동산 푸어인 것이다. 그녀는 버찌나무의 아름다움을 즐기던 자신의 과거 모습에 심취해 지금 현재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 '벚나무 동산'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는 답답한 귀족. 즉, 경제적 이유로 가족의 소유였던 벚꽃 동산을 처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죽은 아들과의 추억도 있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다 말아먹는다는 얘기.
사실 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건 상당히 지배자적 관점으로 느껴진다. 라네프스카야는 배가 고픈 몰락한 지주임에도 불구한 자신의 처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노스탤지어에 빠져 지배자임을 포기할 순 없지만 더 이상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344쪽 "만약 이 고장 전체를 통틀어 뭔가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아니 흥미롭다기보다 훌륭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우리 벚나무 동산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라네프스카야는 자신의 벚꽃동산에 남아 그것을 어떻게든 지킬 궁리조차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떠나 버린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 인물을 보며 고종의 아관파천이 생각났는데, 두 인물은 모두 '아 몰라'하고 도피했다가 슬금슬금 귀환한 후 현타가 세게 왔을 인물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현실 외면과 도피, 자신의 함부로 대하는 파리의 연인을 찾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라네프스카야한테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두 번째 질문: 문제에서 도망간 주인과 남아서 지키고자 한 하인의 날카로운 대비.
주인공과 더불어 흥미로웠던 인물은 늙은 하인, 피르스이다. 농노 해방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농장에 남아 반 하인으로 살고 있고 심지어 라네프스카야가 농장을 버리고 떠났을 때도 이 농장에 남아 지켰으며 또 그걸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게 그 ‘노예근성’인가!? 전환기에 본인의 지배 능력을 상실하고 헤매는 라네프스카야와는 매우 대비되는 자세이다. 피르스는 40-50년 전에는 버찌를 따서 말려 팔고, 잼을 만들어 팔고, 모스크바로까지 보냈다면서 벚나무 동산의 가치를 라네프스카야와 매우 다른 관점에서 피력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가 벚나무 동산을 바라보는 관점은 농노제 시절, 자기에게 주었던 현실적 가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로 인해 동산을 지키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는 점을 표현했다는 점이 체호프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이 좀 불편했던 것은 체호프가 지주에 대한 그의 관점을 드러낼 때 '여지주'를 많이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갈매기]의 여지주와 [벚나무 동산]의 여지주는 둘 다 자기 연민에 빠져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징징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의 단편에서는 이런 젠더의 유형화를 특별히 느끼지 못했는데 희곡 두 편을 읽으면서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두 편 연속 '여지주'들은 답이 없는 인간이다.
마지막 질문: 아냐와 바랴, 두 딸의 역할과 시점을 통해 체호프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하지만 여지주의 두 딸, 아냐와 바랴를 보면서 체호프를 의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역시, 좋아하는 작가를 대하는 나의 자세: 좋아할 이유를 계속 찾아 정당화한다!) 그녀들은 훨씬 어린 존재들이지만 벚나무 동산을 벗어나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아냐는 벚나무 동산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자기만의 세계를 이루어나갈 거라는 암시를 준다.
379쪽 "난 전처럼 벚나무 동산을 좋아하지 않게 됐어요. 예전에는 그렇게도 좋아했는데, 이 세상에 우리 동산보다 멋진 곳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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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집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는 떠나겠어요."
양녀인 바랴는 벚나무 동산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리지만... 벚나무 동산의 새 주인이 된 로파힌과 결혼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 저택을 떠나기를 선택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가 가진 벚나무 동산에 대한 시선은 그의 양어머니의 시선으로 필터를 거친,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벚나무 동산을 읽으면서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을 취사 선택하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선택과 집중하여 쏟아붓는 것이 삶을 고통 없이 사는 전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건 내가 현재 처한 현실이 투영되어 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사춘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고, 나의 커리어에서도 폭풍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가끔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힘들이 휘몰아쳐 내 통제 밖의 상황에 놓이게 될 때가 참 많다. 이럴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예전의 나라면 통제 밖의 일들은 견디지 못하고 아예 놓아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선택지가 될 수 없는 만큼 새로운 선택지를 찾아 헤매고 있는 이 상황에서 체호프는 '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라며 자조적인 위로를 건네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