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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rabbit Oct 05. 2020

흐릿한 2줄

임신 사실을 확인하다.

규슈 여행을 다녀오고 3주가 금세 지나갔다. 연말이라 각종 모임과 회식, 크리스마스, 송별회, 송년회 등으로 많이 먹고, 많이 마신 12월 보내고 나니, 평소 입던 바지가 꽉 끼었다. 식단 관리과 운동이 시급했다. 평소 배워보고 싶던 발레 학원을 등록하고, 저녁엔 줄넘기를 뛰어넘고, 다이어트 한약을 주문했다. 갑작스러운 운동 때문이었을까, 생리 예정일이 일주일을 넘겼다. 종종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주일이 지났다. 대수로웠다. 뭔가 직감이 왔다. 약국에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구매했다.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테스트기를 사용하는 게 정확하다고 해서 다음날을 기다렸다.



뚜렷한 분홍색 줄 하나와 흐릿한 한 줄이 보일 듯 말 듯했다. 확신할 수 없었고, 몇 분 더 지나니 흐릿한 선은 조금 선명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임신일까, 아닐 거야, 임신일까, 아니어야 해!’ 의심은 확신으로, 확신은 불안으로 이어졌다. 지난 3주 동안 마신 알코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주, 맥주, 와인, 사케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돌이켜보면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술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던 게 임신의 징조였을까. 전에 없이 얼큰한 육개장이 먹고 싶어서 새벽 5시에 편의점에서 사다 먹은 게 임신의 징조였을까. 임신이길 바라면서도 내가 마신 알코올이 혹여 태아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임신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선명하지 않은 임신테스트기 줄이 사람을 더 불안하게 했다. 직장에 오전 반가를 내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아기집이 안 보이네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임신이길 바라는 내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했다.


일주일은 정말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난생처음 맘 카페에 가입했다. 인터넷을 뒤졌다. ‘알코올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 ‘임신 확인 전 알코올 섭취’ 등을 검색했다. ‘알코올, 태아’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의 모든 기사와 글을 읽었을까. 대부분은 임신 확인 전에 마신 술은 태아에게 큰 영향이 없다고 했지만, 2~3건의 기사에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문구를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렇게 여자는, 엄마는 임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싶어서 괴로웠다. 


거북이걸음으로 지나간 일주일 후, 점심도 먹지 않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너무 떨렸다. 기대와 설렘, 불안과 걱정이 마구 뒤엉켰다. “산모님, 축하합니다.” “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헛것을 본 것 마냥 ‘에?’하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어 “정말요???”하고 흥분했다. “네, 산모님 축하해요. 여기 아기집 잘 보이네요.” 너무 기뻤다. 언제 걱정과 불안으로 일주일을 보냈었냐는 듯이 너무너무 기뻤다. 내가 엄마가 된다니. 정말? 내가 엄마가 된다고? 내 몸 안에 아기가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너무 신기했고 경이로웠다. 갑자기 내 몸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제 내 몸은 나만의 몸이 아니구나, 너와 함께 하는 몸이구나. 너무 떨렸다. 하얀 덩어리 안에 검은콩 같은 작은 점이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저 조그마한 덩어리가 아기라고? 내 아기라고? 



다음 주에 심장 소리를 들으러 오라고 했다. 지난주는 좀 일러서 확인이 어려웠나 보다고 했다. 신기했다. 일주일 사이에 아기 심장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니. 저 조그만 덩어리에 심장이 들어있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이미 내 몸 안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지난 3주간 술을 좀 마셨는데요...?” 지난 한 주간 나를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던 그 질문을 결국 했다. 선생님은 괜찮다고, 이제부터 조심하라고, 엄마 마음 편하게 가지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게 나는 퇴근 후 가장 큰 기쁨이던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일순에 끊었다. 270일 아기를 품는 그 시간은 그렇게 나의 삶을, 나의 몸을,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시간이었다.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 시간. 나보다 배 속의 아기를 우선하는 삶. 과연 상상도 못 했던 엄마라는 존재가 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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