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전 이야기 2. 태명의 기원
여행 둘째 날,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은 후쿠오카 도심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렸다. 하긴,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온천이 있는 수안보에 가려면 충주 시내에서 꽤 들어가야 하니까. 까무룩 잠이 들었더니 금방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바라본 경치는 정말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봉긋 솟은 산이 마을을 내려보고 있었는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었다.
예약해 둔 숙소로 갔다.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의 안내를 받고 방으로 들어가니, 일본 영화에서나 보던 다다미방이 펼쳐졌다. 일본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옷장을 여니 두 벌의 유카타와 양말, 나막신이 들어있었다. 숙소에는 다섯 개의 온천이 있었고, 각각 사용 시간과 이용 방법이 달라 주의 깊게 설명을 들었다. 당장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아서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지도를 펴니 걸어서 20분 거리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긴린 호수로 가는 길은 볼거리로 가득했다. 마치 우리나라 인사동 같았다. 자동차 하나 정도 다닐 수 있는 좁은 거리 양쪽으로 다양한 군것질거리를 파는 가게부터 귀여운 물건을 파는 상점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맨손을 내놓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차서, 길거리 음식을 먹기는 힘들었지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역시 애니메이션 강국이라 그럴까. 캐릭터 상품들이 즐비했다. 우리나라 인사동이 한국 전통 물건들을 관광객이 구매하기 좋게 가공해서 팔고 있다면, 이곳은 일본에서 만든 모든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평소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남편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캐릭터가 새겨진 문구는 물론 가방, 수건, 카펫, 시계 등 없는 게 없었다. 만화를 보지 않는 나 역시도 마음을 뺏길 정도로 다채로운 물건이 있었다. 개성 넘치는 물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것저것 물건을 구매하려는 남편을 저지하던 나는 결국 하나를 사도록 허락했는데,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고양이 지지가 그려진 미니 퍼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워낙 유명한 감독이라 애니메이션 까막눈인 나도 아는 사람이지만 솔직히 ‘마녀 배달부 키키’는 몰랐다. (후에 얼마나 유명한 애니메이션인지 알고 민망했다. 한국 대형 쇼핑몰에서 키키의 방을 꾸며놓고 전시하고 있을 정도니까.) 고양이 지지가 그려진 퍼즐은 그날 밤 즐거운 놀잇감이 되었고, 키키는 한 달 후 우리 아기의 태명이 되었다.
유후인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유명한 관광지라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긴린 호수에 도착했다. ‘와...!’ 긴린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 깊어 보이지 않는 호수 안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물속에는 물고기도 여러 마리 유영하고 있었다. 긴린 호수를 둘러싼 유려한 산새와 굴뚝으로 나오는 온천수 연기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한 편의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호수 주변을 걸으며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노천탕에서 온천을 한 후 자전거를 빌려 긴린 호수로 다시 향했다. 걸어가며 보던 풍경과 자전거를 타고 보는 풍경은 색달랐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호수 전체를 전세 낸 듯 누릴 수 있었다. 호수는 어제보다 깊고 고요했다. 수면 위로 하얀 물안개인지 김인지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신비로웠다. 멀리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호수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두 번 왔을 뿐인데 이미 친해진 기분이었다.
키키를 선물 받은 특별한 날인, 이 날의 풍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