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lorabbit Oct 05. 2020

따뜻한 뱅쇼가 있는 축제

임신 전 이야기 1. Tenjin Christmas Market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일본 규슈지방으로 온천여행을 떠났다. 온천여행은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전유물로 생각했는데, 뜨끈한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공기를 얼굴로 맞을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몸이 노곤해지는 듯했다. 3박 4일 일정 중 첫날은 저녁에 후쿠오카에 도착해서 도심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시내에 머물며 라멘도 먹고, 쇼핑도 할 참이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전철로 금방이었다. 캐리어 두 개를 숙소에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아기자기한 가계가 저마다 개성 있는 빛을 뿜으며 영업 중이었다.


오랜만에 낯선 언어로 된 간판이 채워진 도시를 편한 운동화를 신고 걸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라멘집에서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브랜드 가게로 가서 마감 전 겨우 쇼핑을 마쳤다. 배도 부르고, 양손도 무거웠다.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 아쉬워서 시내를 좀 걷기로 했다. 밤 9시가 지나자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고, 분주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이 보였다. 뚜렷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길 닿는 데로 걷다 보니, 화려한 조명과 장식이 반짝이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톈진시청 앞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부스마다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개성 넘치는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치 소도시 축제에서 볼법한 작은 무대에서 남자 둘이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고 있었다. 무대 앞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있고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가수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재밌는 이야기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밤이 깊어지니 바람이 꽤 쌀쌀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할아버지 코스튬을 한 사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나도 얼른 손에 브이를 그리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걷다 보니 커다란 오크통이 쌓인 부스가 보였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그곳은 뱅쇼를 파는 곳이었다. ‘뱅쇼라니, 이곳 분위기랑 너무 잘 어울리잖아.’ 나도 얼른 뱅쇼 한 잔을 주문했다. 귀여운 산타가 그려진 컵에 뱅쇼가 따라졌다. 플라스틱 컵이 아닌 머그잔에 주는 것이 신선했다. 기념품이 될 만했다. 향긋한 시나몬 향이 풍기는 따뜻한 뱅쇼를 마시며 무대 위 공연을 멀찍이서 감상했다. 


잔잔히 배경에 흐르는 클래식과 무대 위에 시끄러운 음악, 원 테이블에 동글동글 모여서 동행과 즐거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부스에서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두르고 자신이 만든 물건을 파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전구들, 그리고 적당히 차가운 바람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로웠다.


‘아, 행복하다.’ 온몸에 퍼지는 행복한 기운. 나는 이 기분을 잊기 싫어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남편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고 그날의 분위기를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남편도 몇 마디 어색한 말을 남긴 영상을 남겼다. 이렇게 좋은 순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든든하구나, 결혼하기 잘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우리 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다며, 그 아이와도 꼭 이곳에 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 중 천사를 선물 받았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육아 휴직하고 싶은 3년 차 공무원 J 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