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것들의 언어생활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그르르-갉/그르르륽-갉'이라는 신조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올해 유행하고 있는 신조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등장한 지 벌써 몇 달 되었다고 하네요.
그르르륽...갉이라니.
참 요상한 단어입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동물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 의미를 도통 알아차릴 수 없었지요.
네이버도 아직 파악을 못하고 있네요. '그르르륵..닭'으로 검색할 것을 추천해 줍니다.
(비슷한 단어 '그르르갉'으로 검색하면 관련내용을 보여주기는 합니다.)
예전에 '안습이다', '스압 주의' 등의 단어가 나왔을 때는 제가 그 시대 젊은이였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는데요,
이처럼 특정 게시판에서 호응을 얻은 신조어들이 빠르게 유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럼 이제 그르르륽...갉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씀드릴게요.
'그르르륽...갉'은 (편의점 앞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입니다.
그리고 의자를 끄는 모습을 표현한 의태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궁금하시죠?
바로 '깊대'를 하자는 의미라고 합니다.
'깊대'란 깊은 대화의 줄임말로,
그르르륽...갉 하러 가자고 말한다면
"동네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너와 진솔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라는 말의 1020세대 표현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고요한 새벽에 편의점 의자에 단 둘이 앉아서 얘기하다 보면 진심을 말하게 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유행 현상을 빠르게 포착한 한 편의점 회사에서는 여름 영화 <범죄도시2, 3>에 나왔던 '진실의 방(범인이 진실을 말하게 하는 방)' 컨셉을 접목해 그르르륽-갉을 위한 자사의 의자를 '진실의 의자'로 부르고 경품으로 내걸기도 했답니다. 누가 생각했는지 작명 센스가 대단하네요.
그르르륽...갉이 유행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적습니다.
아마도 편의점 앞이라는 공간은 어린 시절부터 편하게 이용해 왔던 장소이기 때문에 꾸미거나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이끌지 않았나 싶습니다.
늦은 밤, 대화를 방해하는 자극 없이 오롯이 대화의 주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르르륽...갉이 크게 공감을 얻은 이면에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 세대들의 간접적 소통 방식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직접 표현하기는 부담스러우니 이를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대가 거절했을 경우 심리적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거절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유연한 대화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르르륽...갉하러 가자는 제안을 수락한다는 것은, '그래 오늘 너한테 솔직하게 다 말할 거야!'라는 실행의도를 가지고 약속 장소에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만난 장소이니 진실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겠네요.
이렇게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면 '진실의 의자'는 진실만을 말하기로 합의한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규범이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곤 합니다. 마치 도서관에 가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왠지 모르게 그르르륽...갉 하면서 진실을 말하게 되었다는 수많은 경험담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단 1020 젊은이들뿐 아니라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 일상 곳곳에 이런 진실의 의자 같은 공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늘 이 글을 보신 여러분도 신조어를 소개하면서 슬쩍 상대에게 물어보세요.
"나랑 그르르륽...갉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