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는 방향치이기도 하지만 지도는 잘 본다
나는 자칭 인간내비게이터라 말한다.
길눈이 좋다기보다는 길을 잘 기억한다. 한번 걸어봤던 길은 대부분 잘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다른 동네에 있는 문화센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동네는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는데, 한번 친구를 따라간 뒤에는 길이 눈에 익었다. 두 번째부터는 혼자 문화센터에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을 외웠다.
사실 길을 외우지 않더라도 어느 방향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 자체보다는 방향으로 찾아가는 느낌이랄까? 한두 번 다니면서 목적지를 가는 경로를 새기면 몇 개월 후, 몇 년 후에 방문하더라도 그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다. (단, 길이 변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동생은 그렇지 않다. 신기할 정도로 방향을 전혀 찾지 못한다. 숙소에서 목적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갔다고 하면 당연히 내린 목적지에서 반대로 향하는 같은 버스를 타면 처음 출발한 버스에서 내릴 수 있을 텐데 동생은 그걸 못한다. 동생은 버스에서 내린 곳도, 반대편의 노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꼭 이동하기 전에 지도앱을 켜서 가고자 하는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넣고, 내 위치를 확인하며 움직여가며 길을 찾아야 한다.
처음 동생과 여행했을 때는 길치인 동생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지도를 켜서 한번 왔다 가면 그다음부터는 지도가 없어서 편하게 길을 다닐 수 있는데, 항상 갈 때마다 지도를 켜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졌다. 또, 처음 여행을 하던 당시에는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양이 정해져 있어서 더 그랬다. 지도에 사용하는 데이터를 아껴서 그것으로 블로그를 통해 여행 정보를 얻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동생에게 '여기는 어떻게 가?'라고 물어보기보단 '여기 이렇게 가야 된대. 나 따라와.'라고 물었던 일이 많았다. 동생에게 길을 찾게 하는 것보단 그냥 내가 혼자 알아서 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했었다.
"아, 민정아. 여기는 이렇게 가야 된대. 가자."
"민정아, 지도 보니까 여기서 이렇게 가면 되나 봐. 이렇게 가보자."
그러면 민정이는 'ㅇㅋ'하고 따라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나 '길 찾는 것은 나의 역할'이라는 하나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문득 구글지도로 찾기 어려움 음식점을 찾아가다가 나만 길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억울했다. 혼자서 길을 찾는 순간들이. 나 혼자 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혼자서만 길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것에 화가 났다.
함께 온 여행이니까, 함께 길을 찾는 것이 맞지 않나?
그 순간 나는 음식점을 찾던 것을 멈추고 동생에게 화를 내듯이 말을 했다.
"아, 박민정. 나 길 못 찾겠으니까. 네가 좀 찾아봐."
이미 속이 화로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말도 곱게 나오지 않았다. 동생 또한 한참을 길거리에서 헤맨 터라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짜증이야. 나 그 음식점 이름 몰라."
우리가 가는 음식점 이름도 모른다는 것에 또 열이 받았다. 어떻게 가려는 음식점 이름하나 모르고 그냥 따라올 수가 있지. 속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화나는 것들을 튀어나왔다. 그동안 하나둘씩 참고 넘어갔던 것이 강둑이 터지듯 물밀듯 넘어왔다.
"아니, 너는 밥 먹는데 이름도 모르냐고. 카톡으로 보내줄 테니까 네가 찾아봐."
내가 보낸 음식점의 주소를 확인하면서도 동생은 꿍시렁거렸다. 지가 가고 싶다고 한 음식점인데 왜 나한테 난리인지, 지가 못 찾은걸 왜 나한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꿍시렁이었다. 동생은 제법 긴 시간을 꿍얼대면서 지도앱을 살폈다. 현재위치를 확인하고, 지도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식당의 외관사진을 확인하고, 주변 건물들을 살폈다. 혼자 제자리에서 이것저것 살피더니 구글지도를 따라서 길을 걸어갔다.
분명히 아까 지나갔던 길이었는데, 동생은 그 길에 연결된 작은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골목길을 걸으며 몇 번 지도어플에 띄어진 사진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간판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걸으니 곧 우리가 찾고 찾았던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작은 반지하 음식점이었다. 큰 간판도 없이 벽면에 있는 작은 간판이 전부인 곳이었다. 외지다 못해 숨겨진 곳에 위치한 그 음식점을 동생은 자기 나름대로 방법으로 제대로 찾아내었다. 그렇게 내가 길을 못 찾는다고 무시했던 동생이었는데, 동생은 나보다 더 정확하게 길을 찾아내었다.
"언니, 여기 맞지?"
동생은 여전히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나는 내가 만든 환상에 잠겨 동생에게 괜히 화를 냈구나. 동생은 원래부터 길을 찾을 수 있는 아이였는데, 내가 길을 못 찾는다고 생각해서 혼자 길을 찾아놓곤 동생에게 화를 냈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새삼 동생에게 미안해졌다.
"고생했어. 너 콜라 시켜줄게."
"원래 시켜 먹으려고 했거든."
여행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깨달음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