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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영 Dec 02. 2017

동물, 그들이 사는 세상

내가 진심으로 쓰고자 했던 글

러시아계 미국 작가인 Ayn Rand에 의해 1937년에 쓰인 중편 소설 [Anthem]은 완전한 집단주의에 뿌리를 둔 미래 사회를 묘사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용납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출생 시 부모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렸다. 직업도 개인의 선호도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지정되었다.                                    

                                                                                                          

이런 미래사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일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꺼려질 만큼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동물의 세계에선 끔찍한 미래의 이야기도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도 아닌, 현재 그들 앞에 버젓이 일어나는 현실이다.


나는 나의 개와 고양이에게 ‘복’ 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어준다. 복을 많이 받으라는 의미에서 만복이, 복자, 축복이, 행복이, 유복이 등등으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반려동물은 대부분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개체의 특성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며 이는 조금도 어색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험동물과 농장 동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처음 제인 구달이 침팬지를 연구할 때 이름을 붙인 것이 논란이 될 정도로 이들에게는 이름보다는 숫자를 부여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축산업에서 꼬마 돼지 베이브처럼 이름을 가진 동물을 찾아보기란 힘들어졌다.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형성되는 독자성과 교감이 오히려 불편해진 세상이다.

                                                                                                                 

또한 동물들은 충분한 시간 동안 어미와 함께 할 수 없다. 돼지의 경우 자연계에서는 4주간 어미의 젖을 먹고 8주 뒤에 독립을 하지만 농장에서는 빠르면 2주에도 어미젖을 떼고 어미와 분리를 시킨다. 새끼와 빨리 떨어질수록 더 빨리 어미 돼지를 다시 교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농장 동물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어미와 함께 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된다. 종견이라고 불리는 암컷 개는 조그만 철장에 갇힌 채 계속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토끼는 자신의 눈에 독성 반응을 시험하는 물질을 계속 접촉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동물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야생 동물은 어떠한가.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들이 원한 일이었을까?                 

                   

,강아지 공장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공장식 축산에, 강아지 공장에, 동물을 상품으로만 여기는 행동은 이제 멈춰야 한다.


지난해 11월 17일 이후, 60일간 3202만 마리의 가금류가 AI로 인해 살처분되었다. 역대 최대이다. 이로 인한 세금의 지출도 막대하다. 공장식 축산으로 해마다 조류독감과 구제역이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한 재정지출이 3조 2300억 원이 넘는다. 이번 조류독감으로 인한 보상금만 2900억 원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해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제는 그 근본 원인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우리의 육식 소비는 날로 증가하고 있으나 그 경제적 부담은 적어지고 있다. 오로지 더 싸게 더 많은 고기를 공급하겠다는 목표로 발전시킨 축산업 덕분이다. 그 결과 효율성과 경제성이란 미명 하에 적은 면적에 더 많은 가축을 사육하고, 더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였다. 이런 공장식 축산은 당연시됐다. 동물을 위한 환경 개선은 쓸데없는 돈 낭비로 치부했으며 그 결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축들은 면역력이 떨어지고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항생제는 필수가 됐다.


이런 환경에서 병에 안걸리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이런 취약점을 가리기 위해 쓰이는 엄청난 양의 항생제는 이제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은 반복됐으며 그로 인해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같은 전염병에 극단적으로 취약한 생산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동물의 질병의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런 점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애써 묵인해 오던 공장식 축산의 전말이다.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로 인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편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대신에 조금은 고맙게, 조금은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 이런 마음들이 모이면 동물들이 처한 (우리 자신은 결코 처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조금은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지속가능한 농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물들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다.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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