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4마리 고양이 2마리와 함께하는 나의 밤 시간
나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고질병이 있다. 바로 불면증과 악몽이다. 그래서 항상 밤이 오는 것이 두렵다. 이 깊은 밤을 또 어떻게 지새울지 겁이 나고, 어찌어찌 잠이 든다 해도 악몽에 시달리니 숙면을 취할 길이 없다. 악몽은 어쩌면 그렇게도 나를 속속들이 꾀고 있는지 나의 아픈 곳만 푹푹 찔러대니 악몽에서 깨면 한참을 숨을 고르게 된다.
예부터 잠이 보약이고 토마스 데커는 잠은 건강과 육신을 묶는 황금 사슬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중요한 잠을 나는 수년간 못 누렸으니 몸이 지칠 대로 지쳐있을 수밖에 없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에는 잠을 자야만 하니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기도 했으나 수면제는 잠이 들게는 해주지만 숙면을 취하게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극심한 악몽은 그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나에게는 밤이 그저 공포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고통도 시골에 오면서 조금 누그러질 수 있었다. 맑은 공기와 적당한 육체노동, 그리고 더 이상 받지 않는 상처와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나를 달콤한 꿈의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랬다면 더 바랄 게 없는 해피 엔딩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불면증과 악몽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의 공포의 시간을 누그러트린 것일까? 바로 나의 아이들이다.
처음에는 개들과 따로 잠을 잤었다. 서울에서와 달리 시골에서 아이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힘들었고 나만의 개인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잠은 내 방에서 고양이들만 데리고 잠을 잤다. 그러다가 소복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함께 자기 시작하고, 유복이가 너무 추워한다는 이유로 데리고 들어가고, 혼자 두기 마음 아프다는 이유로 축복이까지 내 침대를 차지했다. 그러다 예이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 방에 들어오고 싶은 애들은 모조리 데리고 들어가 잔다는 게 집채만 한 편백이까지 내 방에 들어앉게 되었다. 이렇게 결국 실내에서 생활하는 애들은 모두 내 방에서 잠을 자게 된 것이다.
모든 애들이 내 침대에서 자니 나의 침대는 꼭 노아의 방주와 같아졌다. 모든 아이들을 싣고 꿈을 항해하는 노아의 방주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노아의 방주를 운행하고부터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아졌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잠이 들 때까지 무료하지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리고 악몽을 꾼다고 하더라도 눈을 뜨면 새근새근 나에게 기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이 보이니 그저 현실이 꿈과 같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생활의 끝자락에 잠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세상은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는 하루하루 새로운 세상을 만나거나 만들어간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그렇게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잠을 방해할까 봐, 내 방을 지저분하게 만들까 봐 아이들을 내 방에 들어오게 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이런 것들은 정말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내 염려대로 그들은 내 잠을 방해하기도, 방을 더럽히기도 하지만 내 고질병을 함께 해쳐나가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어느 누가 매일 밤 새벽에 수시로 깨는 나를 피곤한 내색 없이 꼬리 치며 반겨주고, 악몽을 꿨다며 매일 칭얼대는 나를 언제나 포근하게 토닥여 주겠는가? 그러니 나는 이들이 한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조정권에 <고요로의 초대>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보면 꼭 나의 아이들이 나를 이 긴 밤의 고요 속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나의 아이들의 초대에 응해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깊은 밤을 조용히 쉬어갈까 한다.
<고요로의 초대>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거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아카시아 꽃 달콤한 냄새가 방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