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상처 치유법
나는 소심하고 겁도 많고 예민한 편이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담대하게 받아들이지만 속으로는 새가슴이 되어 벌벌 떠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못해 상대의 언행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어렸을 때 겪었던 트라우마 덕에 사람을 잘 믿지도 못하니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이들도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성격인 내가 유독 상처를 잘 받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법률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상처를 줬다고 하는 사람은 못 봤다.” 정말 뇌리에 새겨지는 말이었다. 내가 받은 상처의 대다수도 상대가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말과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 그 말과 행동에 살을 붙여 상처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도 상처를 받는 것이 멈춰지지도 치유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나에게는 아프게 꽂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처를 받는 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 하면 이런 나를 조금은 덜 아프게 조금은 덜 흔들리게 나를 잡아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법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그러했다. 동물을 키우기 전에는 ‘강돌이’라는 강아지 인형을 껴안고 위로를 받았다. 그 인형은 내가 유학을 갈 때에도 그 많은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과정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의 캐리어에 소중히 담아갔었다. 돌아올 때도 물론 다른 짐들은 다 버려도 강돌이만큼은 다시 데리고 왔다. 어린 시절은 강돌이와 함께하였고 그 뒤에는 ‘숑숑이’라는 슈나우져 개와 함께했다.
동물을 많이 키워도 유독 더 위로가 되고 나에게 안정을 주는 개들이 있다.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하고 예쁘지만 그래도 유독 나를 따르고 충직한 녀석들이 있다. 그런 아이 중에 하나가 숑숑이였다. 이전에는 동물들은 내가 보살펴주고 사랑을 아낌없이 줘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런 관계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수행하였다. 하지만 숑숑이를 통해서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다. 동물들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를 아끼며 누구보다 나를 걱정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깨달음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의지를 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따뜻한 햇살 속에서 정원 벤치에 앉아서 내 옆에 앉아있는 숑숑이를 안아주는 것이다. 그러면 햇살이 나를 안아주고 내가 숑숑이를 안아주고 그렇게 서로서로 위로와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것 같아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또는 따듯한 이불속에서 숑숑이의 듬직한 등에 기대어 자거나 숑숑이의 새근새근 자는 숨소리를 듣거나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도 조용해지고 나의 시끄럽던 마음도 어느새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숑숑이는 작년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를 소복이가 채워주고 있다. 하는 짓이 너무도 숑숑이를 닮아서 꼭 숑숑이가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나에게 보내준 것 같기도 한 소복이가 요즘에는 숑숑이를 대신해서 나를 위로해준다. 아직은 어려서 왈가닥 장난이 더 심하지만 그런 에너지가 나는 너무 좋다. 나도 그 에너지를 받아 더 밝고 힘이 나는 것 같아서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동물들도 나처럼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버려진 동물들만 키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식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동물과 함께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반대이다. 이들이 없다면 나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이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인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 몇 자 적어본 다는 것이 글이 길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동물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그들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더불어 살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