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포항으로 이박삼일 여행을 왔다. 디자인을 전공하신 이경형 교수님의 ‘단구예술농장’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과 농장이고 실제로 지금도 사과 농사를 짓지만 알고 보면 여기는 교수님의 작업실이자 문화 커뮤니티 기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단구는 ‘붉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아내의 친구인 ‘나무 달팽이’의 정미 씨 희관 씨 부부와 함께 오기로 했는데 우리가 바쁜 척하는 바람에 이제야 내려오게 된 것이다.
교수님의 따뜻한 환대에 우리는 모두 무장해제했다. 컨테이너들 사이 마당에 차려진 테이블엔 건강한 식재료가 만드는 맛있는 식사가 끼니때마다 즐거움을 주었고 집과 마당 전체에 늘 흐르는 KBS제1FM의 클래식 음악은 현재 삶의 윤기를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둘째 날은 이 교수님의 고향 선배이기도 한 박수철 화백님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 화백은 빛과 그림자를 아주 잘 표현하는 멋진 화가였다. 우리는 박 화백이 만들어주시는 팥빙수를 먹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아내와 나는 특히 가족이 식사를 하는 그림이 너무 좋았다. ‘구만인상2’라는 작품도 아주 환상적이었는데 우리나라 지도 중 꼬리처럼 톡 튀어나온 곳이 동녁끝 ‘구만(九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실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은 단란주점인데 이름이 ‘지우개’였다. 여기서는 술을 마시고 나쁜 기억을 다 지우는 모양이지? 하고 감탄했더니 아내가 깔깔깔 웃었다.
포항물회도 사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나는 다른 음식은 다 잘 먹어도 신 걸 못 먹는 편인데 여기서 파는 물회는 빙초산을 들이붓지 않아 맛있었다. 전날의 과음 때문인지 일행 중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아내와 나만 멀리 떨어져 앉아 각 일 병씩 소주를 마시는 추태를 부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몇 병 사 왔지만 다들 지치고 또 다음날 아침에 이 교수님이 외국으로 떠나시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잊지 못할 환대와 식사 자리였다. 새벽에 깨서 아내와 두런두런 이런 얘기를 나누다가 샤워를 하고 이 글을 쓴다. 게으름 피우느라 미루다 보면 고마운 마음이나 흐뭇한 기억도 그냥 생각만으로 그칠까 봐서 지금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