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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27. 2022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심각하거나 슬픈 얘기를 각 잡고 쓰면 읽은 사람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자를 따라 나도 거룩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이상한 의무감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얘기라도 어깨에 힘 빼고 농담도 섞어가며 툭툭 던지는 형식이 되면 독자는 이내 작가의 편으로 돌아서 페이지 페이지마다 함께 울고 웃게 된다. '빨치산의 딸'이었던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딱 그렇다.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를 따라 엄마도 지리산 빨치산이 되어버리자 동생은 물론 조카들까지 연좌제에 걸려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60여 년의 이야기이니 얼마나 서럽고 심란하겠는가. 그런데 정지아는 아버지가 고향 구례에서 전봇대를 받고 죽은 첫 장면부터 3일장이 끝나는 날까지 시종일관 유머와 시니컬로 장례식 안팎 풍경을 요지경처럼 묘사한다. 게다가 네이티브의 입말로 살아난 전라도 사투리의 능청스러움은 그야말로 보너스다.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염상구 이후로 이렇게 찐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등장인물들은 또 어떤가. 보따리 장사 대학 강사로 생활하는 외동딸 아리는 자신의 이름이 '개 같다'라고 투덜거리고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 고상욱은 지리산 추위와 배고픔은 다 참았으면서도 고추농사 노동의 힘겨움을  견디지 못해 일하다 말고 집으로 들어와 소주를 마셔댄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천이백만 원 빚보증을 섰다고 야단치는 아내에게 "자네 혼차 잘 묵고 잘 살자고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뭣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라고 일갈하는 결기를 보이기도 한다. 육사에 합격하고도 작은아버지 덕분에 신세를 조진 큰집 길수 오빠는 위암 말기인데도 고인의 장례식에 와서 "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속 없는 인간이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인 노랑머리 여자애도 독자를 어이없이 웃다 울게 만드는 문상객이다. 제일 웃기는 사람은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자기 총에 친구들이 맞아 죽을까 봐 식량 보따리에 눈물 어린 편지까지 써 놓았던 사람이 정작 자신은 교련선생이 되고 '35회 졸업생들 아지트'인 삼오시계방 주인이 되고 급기야 조선일보 구독자라는 이유로 친구  고상욱에게 평생 바가지로 욕을 얻어먹는 박 선생 박한우다. 평생을 투닥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1900년》에서 말년까지 티격태격하던 로버트 드 니로와 제라르 디파르디유가 떠오르기도 했다.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유시민 작가가 너무 재밌다고 극찬하는 바람에 한꺼번에 5만 부를 인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정지아 작가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우리 집 고양이 순자가 정 작가가 기르는 고양이들의 새끼라는 인연으로도 그 소식이 눈물겹게 반갑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소설이다.

오늘 김제에 신혼살림을 차린  오랜만에 서울에  진주(내가 '어른들 말씀을 듣지 마라' 결혼식 축사를 써줬던  후배다) 데리고 동양서림에 가서  책을 강제 구입하게   나는  작가의 단편집  『자본주의의 적』을 샀다. 재밌다고 소문난 책인데 목차를 보니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이라는 제목이 버티고 있다.  얼마나 웃길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오랜만에 무척 재밌는 책이 나왔다. 연말까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은 사람이 주변에 없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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