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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3. 2019

금주일기 2

티켓 한 장 편

금요일의 가열찬 음주 덕분에 컨디션이 바닥으로 내려간 토요일, 하루 종일 운기조식에 힘쓰다가 저녁에 빨래방에 겨우 갔다 와서 거실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당신 일요일에 약속 있어."

"어? 나, 약속 없는데?"

"방금 생겼어."

"..."


은곡도마 이소영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일요일에 충무로 한옥마을에서 진도 씻김굿 공연이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권유도 권유지만 진도 씻김굿이라면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거기 가면 술자리가 생길 게 뻔하니 우린 공연만 보고 얼른 나오자고 약속을 했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차려먹은 뒤 전철을 타고 충무로 한옥마을로 갔다. 날은 햇볕이 찌를 듯 기승을 부려 모두들 입구의 본부 천막에서 나눠주는 종이모자를 받아 썼다. 어디서 알고들 오는지 단오를 며칠 앞둔 한옥마을엔 벌써 전국 각지에서 온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전철역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를 하나씩 사들고 무대가 펼쳐지는 천우각 광장으로 가서 앉았다. 신용카드를 넣고 메뉴를 선택하는 기계 몇 대를 놓고 여성 혼자 근무하는 곳이었는데 커피값이 아주 쌌다.  오후 4시 가까이 되어 진도에 같이 갔던 선화 씨를 만났고 곧이어 도착한 소영까지 만나 같이 스탠드 좌석에 앉았다. 소영은 무대 뒤로 가서 진도 씻김굿 보존회 어른분들께 미리 인사를 드리고 다시 왔다. 맨 처음 펼쳐진 공연은 '권원태의 줄타기'였는데 줄을 타는 권태현 명인과 아래에서 사설을 하는 남자분이 주고받는 재담이 재밌어서 모두들 깔깔대며 박수를 쳤다. 아슬아슬 줄을 타던 명인에게 관객들이 다가가 만 원짜리를 건네는 장면에서 많은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마지막에 누군가 오만 원짜리를 건냈을 땐 명인의 입이 함지막만큼 벌어졌다.



이어서 진도 북놀이가 이어졌고 '락음국악단'이라는 퓨전국악팀의 연주도 있었다. 이 팀에서는 어떤 젊은 여성 뮤지션이 드럼과 북 등 다양한 타악기를 연주했는데 단연 눈에 띄었고 인기도 좋았다. TV프로그램에도 나왔다는 젊은 국악인 고영렬의 노래가 있었고 드디어 메인 무대인 진도 씻김굿이 펼쳐졌다.  진도 씻김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씻어서 하늘로 올려준다는 신성하면서도 흥겨운 제례의식이다. 전국에 있는 많은 씻김굿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진도 씻김굿이 음악적인 면이나 스토리텔링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데 나는 운 좋게도 그걸 벌써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이번엔 실제로 상을 당한 분의 신청이 있어서 중간에 그분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씻김굿을 받기도 했다. 진도 씻김굿 보존회에서 온 씻김굿 인간문화재와 명인들의 무대가 장엄하고도 세련되게 펼쳐졌다. 이어 '다시래기'라는 극도 짧게 선보였는데 장님인 남편과 출산에 임박한 아내, 그리고 아내와 정분이 난 스님 등이 등장하는 익살극이었다. 특히 아내 역을 맡은 남자분의 연기가 뛰어났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 분은 평소 진도의 공사장에서 목수로 일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마지막엔 요즘 '미스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진도 출신의 가수 송가인과 동료 가수 숙행의 무대가 펼쳐졌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한옥마을을 벗어나 전철역 쪽으로 내려왔다. 소영과 고수 태영 씨, 그리고 아까 퓨전 국악팀에서 북을 쳤던 인경 씨 등을 만나 근처 고랭지 삼겹살집으로 갔다. 우리는 물만 마실 생각으로 미리 김밥과 쫄면 만두 등을 먹고 갔는데 소영이 대뜸 "오빠, 그 티켓 나한테 한 장 써!"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6개월 금주를 결심하면서 아내와 내가 '중간에 술을 마실 수 있는 티켓 세 장'만 만들자고 했던 얘기를 알고서 그중 한 장을 당장 자신에게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쓰자. 나는 아내와 짧게 눈빛을 교환했고 아내는 즉시 소맥을 말았다.  



고수 태영 씨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그리고 아까 '다시래기'에서 연기를 펼쳤던 명인들의 얘기도 했다. 우리는 평소 목수로 일하는 분까지 그렇게 연기와 소리를 잘하다니 진도는 정말 '한집 건너 하나씩 인간문화재가 산다'는 말이 맞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술을 다 마시고 우리는 타다 서비스를 불러 집으로 먼저 가기로 했다. 그런데 태영 씨가 어른들이 계시는 낙원상가로 가야 한다며 자기 차를 가져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설마 음주운전을 감행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우리가 부른 타다를 함께 타고 낙원상가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된 거 어른들에게 인사나 드리자고 종로사우나 건물에 있는 '려향'이라는 가게로 들어갔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곳이었는데 가게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북이 놓여 있는 게 다른 가게와 다른 점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했더니 사장님이 진도 분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오신 진도 어른들이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대부분 인간문화재라서 그런지 트로트를 참 구슬프게도 부르신다. 태영 씨의 작은 아버지뻘 되는 어른도 부르고 조상현 선생의 수제자였다는 분도 부르고 송가인의 어머니도 부른다. 다들 평범하게 생긴 분들인데 무대에만 올라가면 일류 가수들로 변하는 게 신기했다. 중간에 가게 여사장님이 북채 두 개를 들고나가 엄청난 북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 가게에서 술값을 안 내고 나가면 저 북채로 맞는 것이여"라는 썰렁한 농담을 해서 아내에게 비웃음을 샀다. 우리는 맥주와 소주를 마시며 노래애 맞춰 박수도 치고 파도도 탔다. 태영 씨가 만들어주는 레몬소주도 마셨다. 어른들을 대접하는 의미로 소영도 무대로 나가 '낭만에 대하여'를 멋지게 부르게도 했다.


태영 씨 아버님이 이제 이 자리는 파하고 밖으로 나가서 국수나 한 그릇씩 사 먹고 헤어지자고 하셨다. 그래서 종로3가 포장마차촌으로 나가 안주와 술을 또 시켰다. 라면과 우동도 시켰다. 그리고 다들 또 술을 마셨다.  새벽 한 시 반이 넘어 지친 어른들이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을 잡는 걸 보고 우리들도 일어나 택시를 잡았다. 포장마차촌엔 빈 택시가 아주 많았다. 집으로 들어오니 두시 반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고 월요일 조조로 예매했던 영화 [기생충] 표 한 장을 취소했다. 나 혼자 월조회(월요일 아침마다 조조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를 재건한 김에 [엔드 게임]에 이어 2탄으로 그 영화를 다시 한번 관람하려 했었는데 술도 취했고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 미치겠다. 일요일 저녁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라고 중얼거렸더니 아내가 "여보, 그분들은 예술가들이잖아."라고 하며 웃었다. 아, 그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지. 예술가들은 정말 세다. 그나저나 나의 금주 일기는 이러다가 음주 일기로 변할 지경이다. 이젠 정말 술 마시지 말아야지. 수요일 술자리부터는 반드시 물만 마셔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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