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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07. 2023

화 안 내며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국민일보 칼럼 : [글쓰기로 먹고살기]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제법 오래 일을 했다. 그래서 책을 냈을 때 ‘너는 직장에서 글 쓰는 일을 계속했으니 책 내는 것도 힘들지 않았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가 쓰는 건 글이 아니라 메시지다. 카피는 짧은 시간과 한정된 지면에서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므로 간결하고 함축적인 게 생명이다. 잘했든 못했든  나는 이십여 년 간 카피라이팅으로 짧은 글 쓰기 테크닉을 익혀온 셈이고 그건 결국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나만의 장점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광고 카피를 쓰면서 행복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속상하고 화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일단 카피는 참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게 광고 카피의 기본이므로 ‘입 달린 자’들은 누구나 내가 쓴 카피에 참견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지적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라는 인상비평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광고주는 언제나 옳다는 ‘을의 정신’에 입각해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은 수시로 벌어졌다. 한 번은 내가 쓴 기업의 홍보영화 시나리오 때문에 불려 간 적도 있었다.   

  

광고주의 심기를 건드린 건 ‘시작은 정직이었습니다’라는 홍보영화의 리드 카피였다. 자기들은 지금도 정직한데 왜 과거형이냐는 것이다. 읽어보니 과거형이 맞긴 했지만 그건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 위해 쓴 과거형이 아니라 과거의 그 상태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의 서술임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가 이미 과거형이라 판단을 내렸으므로 대안도 없이 언쟁을 벌이는 건 ‘을’의 태도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 계급이 깡패라더니, 맞는 말이구나.  


20초짜리 라디오광고 카피를 고심해서 썼더니 ‘내용은 좋은데 뭔가 파워가 좀 약한 것 같다’라는 모호한 피드백이 왔다. 카피를 아무리 다시 읽어보아도 특별하게 손댈 부분이 없었고 오리려 고칠수록 이상한 문장이 되었다. 나는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똑같은 카피에다 느낌표 두 개만 찍어서 다시 보냈다. 피드백이 왔다. “수고했어. 훨씬 강해졌는데?!” 역시 화가 났다.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얄팍한 속임수라니.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었다. 광고회사 때보다 훨씬 못한 돈을 버느라 늘 쩔쩔맸지만 그래도 화를 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의 글은 특별한 목적이 없었으므로 시비 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글의 내용이 왜 이렇게 사소하냐’라는 항의가 가끔 있었으나 그건 정말 사소한 항의였으므로 웃어넘길 수 있었다. 글쓰기의 좋은 점은 성공이나 효율, 최고 등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있었다.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라서 누구도 이길 수 없고 당연히 지는 사람도 없다. 그저 내 인생을 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뿐이다. 글쓰기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까닭이다.

나는 오랫동안 '누구와 경쟁해서 이기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백일몽을 꾸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는 협력해서 함께 가는 게 더 우월한 것 같은데 세상은 좀처럼 그런 가치 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요즘은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심리학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글쓰기에서도 경쟁은 존재한다. 책을 낸 사람 중 1쇄를 넘기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중쇄를 찍자'라는 일본 드라마가 다 있을까. 그 와중에 1만 부 넘게 찍은 책의 작가가 된 건 순전히 행운이다.


어떻게 하면 돈이 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할리우드의 스토리 컨설턴트로 일한 리사 크론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라는 책에서 “완벽한 원고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다만 이전 원고보다 조금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라.”라고 했다. 위안과 행복이 느껴지는 말이다. 나도 한때는 특정 정치인을 비방하는 인터넷 카페에 가서 분노의 글들을 써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소용없는 짓이다. 화를 내지 않으면서 글을 쓰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쓰다 보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건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제까지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용기를 내서 여기에도 털어놓는다. “네가 나아진 인간이라는 증거를 대라.”라고 하고 싶은 분은 잠깐 진정하시라. 화를 내며 쓰는 글은 늘 좋지 않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81062&code=11171461&sid1=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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