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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5. 2019

정유정의 화려한 귀환

소설 [진이, 지니]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유정의 새 소설 [진이, 지니]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 첫 문장이다. 그는 '바다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준비하느라 일 년 남짓 그 작품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새벽 읽은 한 줄의 문장 덕분에 그 프로젝트를 집어치우고 '영장류 보노보의 몸 안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간 사육사 이야기'를 신들린 듯 쓰게 된 것이다.


정유정이 판타지 소설을 쓴다면 뭐가 다를까? 전작들을 통해 유추해 보면 그는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구축한 판타지 소설이 현실처럼 느껴질 수 있게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보노보라는 영장류의 생태와 습성, 성격, 생김새는 물론 그 종의 역사와 현재적 위치까지 엄청나게 자료 조사를 했을 것이며 아프리카 콩고에서 포획되어 한국으로 밀반출된 보노보의 몸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간 35세 여성 사육사의 심정을 어떻게 하면 진정성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매 순간 고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한 설정 하에서 벌어지는 스토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도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350페이지쯤 되는 이 소설을 다 읽었다. 예상대로 지방의 한 별장과 산, 계곡, 병원 등을 오가며 벌어지는 사흘 간의 스토리는 속도감이 넘쳤고 인물들의 개성과 핍진성도 뚜렷했다(그 인물 속엔 보노보 '지니'도 포함된다). 역시 정유정은 글을 잘 쓴다. 쓸 데 없는 감정은 배제해버린 간결한 문장들인데도 읽다 보면 어느새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독서의 몰입을 도와주는 시각적 묘사와 간간이 감정 이완을 시켜주는 위트 섞인 펀치라인들도 소설 읽는 즐거움을 더해줬다. 진이나 지니 말고도 우연히 그들의 삶에 끼어든 또 하나의 주인공 김민주라는 남자 캐릭터도 강호를 맨몸으로 떠도는 협객처럼 매력적이었다.


자신의 육체를 중환자실에 놔둔 채 엉뚱하게 보노보 지니와 몸을 공유하게 된 '다정한 그녀' 진이의 끝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눈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진이의 생각은 좀 달라진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보노보의 입장에서 보면 진이는 일종의 침입자가 아닌가. 그래서 김민주와 장 교수가 만나 종의 구분을 뛰어넘는 공감을 연출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다. 특히 민주가 지니에게 이진이의 신분증을 건네는 에필로그의 그 장면...


정유정의 화려한 귀환이다. 난 이전 소설 [종의 기원]이 너무 하드하고 서늘해서 좀 싫었는데 이 작품은 드라마틱하면서도 서스펜스와 유머의 완급조절이 잘 되어 있어 읽는 즐거움까지 만끽하며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김민주가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이진이와 휴대폰을 통해 첫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레마르크의 [개선문] 첫 문장을 이용한 것도 너무 좋았다. 다른 작품에서 레이먼드 챈들러 얘기를 슬쩍슬쩍 흘렸던 것처럼 이번엔 레마르크를 통해 정유정은 자신의 작품 한 구석에 '문학적 싸인'을 남기는 것조차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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