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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15. 2019

능숙함과 착한 마음이 함께 쓴 소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좋은 작가들의 미덕 중 하나는 예를 잘 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다시 읽으며 했다.  말하자면 동급생을 칼로 찔러 죽인 소년이 어른이 된 후  여자를 만나  "인간이라는 건 결국 패턴이야"라고 말하며 의사가 약을 주는 행위는 '패턴을 없애는 게 아니라, 패턴 속을 돌아다니는 전기신호를 느리게 할 뿐이었다. 물이 천천히 흐르면 강이 범람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이었다.'라고 쓴 문장 같은 것 말이다.


예를 잘 들수록 독자들은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편하다. 그것은 소설을 들을 때나 강의를 들을 때나 똑같다. 관념적으로 명제만 던져 놓으면 앙상하지만 비유와 예시로 살을 붙여나가면 주제가 살아난다. 그래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육화'라고 하는 모양이다. 소설을 두 번째로 읽는 거라고는 하지만 거의 새로 읽는 기분이 들어서 에버노트의 메모를 검색해 보니 책을 산 게 2016년 1월의 일이었다. 읽은 지 3년이 넘었으니 어쩌면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신선한 기분으로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누렸다.

어젯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맨 앞장에 짧게 독후감을 메모하면서 이 작품을 단순히 살인사건이나 속죄, 재회 등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하면 섭섭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개인적으로 섬세한 문체나 구성도 좋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건 작가가 '시공간 연속체'라는 SF적 아이디어의 싹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잘 살려냈다는 점이었다. 그 이야기로 시작한 '우주알'이 결국엔 인간사의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며 이런저런 궤변을 펼치다가 마지막엔 의외의 감동까지 만들어내는 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보너스 같은 느낌이었다. 장강명은 각종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로도 유명한데 이 작품은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능숙함과 착한 마음이 만나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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