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an 23. 2023

밑줄을 긋지 않고 읽은 소설

김경욱 장편소설 『동화처럼』

사실은 동양서림에서 다른 책을 사려고 매대를 뒤지고 있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김경욱의 이름을 자주 들었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반성이 들었고, 소행성 글쓰기 워크숍에서 소설 좋아하는 양 선생이 '소설의 왕'이라며 이 작가 이야기를 했던 게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라 책을 집어든 것이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십 년 전에 나온 소설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나온 모양이었다. 평론 뒤에 초판 작가의 말과 개정판 작가의 말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김경욱의 『동화처럼』은 3당 합당 시절 대학 노래패에서 만났던 백장미와 김명제가 6년 후에 다시 만났는데 교통사고로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만나 또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는 장편 소설이다. 따지고 보면 세 번 결혼을 하지만 첫 번째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세 번째는 결혼 전에 소설이 끝나니 진짜 결혼은 한 번 뿐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소설가는 잘 되는 이야기보다 잘 안 되는 이야기를 잘 지어내야 되겠구나. 남녀가 만나는 이야기보다 헤어지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어야(물론 그 얘기는 괴롭겠지만) 이야기가 스피디하게 진행이 되겠구나.


다행히 김경욱 작가는 이야기도 잘 지어내고 문장도 좋았다. '합리화의 연금술은 절망의 초토에 기어코 희망의 싹을 틔워 올렸다'라는 문장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연민이 잘 느껴져 웃었고 '눈앞에 있을 때는 침이 말랐고, 보이지 않을 때는 피가 말랐다'라는 문장에서는 심리 묘사도 유머러스하게 잘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보다 더 밑줄을 긋고 싶었던 부분은 짝사랑하던 한서영 때문에 보게 된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명제의 쓸쓸한 소감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했던 미국 화가의 그림 속 인물들은 새벽의 선술집에서, 밤의 호텔 방에서, 야간열차의 객실에서 저마다 혼자였다. 곁에 누군가 있을 때조차 그들은 고독해 보였다. 엉뚱한 자리에 꽉 박힌 나사못처럼."

그리고 장미가 명제와 헤어져 혼자 살 때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밤마다 조금씩 이야기를 적어 나가다가 나중에 동화 작가가 되는데, 평화롭지 못한 시절에도 '글을 쓸 때만큼은 살아 있다는 충만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는 장미의 고백이 당연하면서도 괜히 반가웠다.


나는 소설이든 에세이든 책을 읽다가 줄을 치고 귀퉁이를 마구 접어놓는 편이다. 그런데 이 소설만큼은 깨끗이 읽고 알라딘에 가서 팔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그런 마음을 먹으니 쉽게 줄을 칠 수가 없었다. 장미가 명제와 별거할 때 그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장면 '장미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호밀 빵처럼 무미건조했지만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새록새록 했다'라고 설명한 문장에 나도 모르게 줄을 칠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대신 리뷰 노트를 펼쳐 몇 개의 문장을 메모했다.

어쨌든 나는 밑줄을 긋지 않고 책을 다 읽는 데 성공했으나 아내가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으니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아내도 줄을 치지 않고 책을 다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땐 정말 알라딘에 내다 팔 생각이다. 아, 김경욱이라는 소설가에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냥 나는 아직 알라딘에 책을 팔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다. 매번 책을 사기만 하는 게 억울해서 이번엔 한 번 팔아보려는 것뿐이다. 물론 그 돈으로 또 딴 책을 사 오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도서관 없애지 마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