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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24. 2023

헛된 삶은 없다고 말하는 저항의 뮤지컬

뮤지컬 《웨이스티드(Wasted)》

전쟁 영웅이었으나 정치적인 농간에 의해 결국 화형 당했던 잔다르크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세인트 조앤>을 보고 단박에 백은혜 배우의 팬이 되었다. 조그마한 키와 평범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한 파워와 연기력, 뛰어난 딕션 등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대학로 연극열전 리스트 중  백은혜 배우의 이름을 발견하고 아내가 조기 예매한 《웨이스티드》를 보러 아트원씨어터2관으로 갔다. 내가 "웨이스티드가 무슨 뜻이야? '버려진, 낭비된'인가?"라고 아내에게 물었을 정도로 나에게는 정보가 없었다. 물론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을 쓴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세련되고 꽉 찬 느낌의 록음악이 전반에 흐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1840년대에 여성들이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았으므로 브론테 자매들은 가명으로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낸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잡지를 만들며 놀았던 경력의 소유자들이었기에 시도 소설도 거침없이 썼다. 솔직히 나는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이 발표 당시에 그렇게 혹평을 받았는지는 몰랐다.  그 소설은 음산한 힘과 등장인물들의 야만성,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 등등으로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고 한다(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에 선정된 이 명작도 처음엔 이렇게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에밀리는 이런 혹평 덕분에 충격을 받은 데다가 오빠의 장례식에서 얻은 감기까지 겹쳐 결국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죽는다. 하지만 극 전체는 활기와 흥겨움으로 넘친다. 백은혜, 김지철, 홍서영, 임예진 네 배우의 합이 정교하게 들어맞고 드레스에 따로 마련한 마이크꽂이가 상징하듯 배우들의 샤우팅 창법은 이 드라마가 거의 200여 년 전 이야기라는 걸 잠시 잊게 한다. 펜 대신 마이크를 쥐고 글을 써내려 가는 브론테 자매들의 박력이 압도적이다. 천 권을 찍은 책 중 단 두 권만 팔렸어도, 독자들이 망작이라고 혹평을 해도 결국 쓸 사람은 쓰고 만다. 창조의 기쁨이라는 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추구할 가치가 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샬럿 브론테의 인터뷰로 시작한 극은 마지막 장면도 샬럿과 그의 남동생과 자매들 목소리로 끝난다. "세상에 헛된 삶이란 없어."라는 백은혜  배우의 대사에서 제목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도 얻었다. 그렇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아내는 극장을 나오며 "연극열전에 오르는 작품들은 실패할 확률이 적어. 공인된 외국 작품을 들여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거야."라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궁금해서 아침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영국의 극작가 칼 밀러와 작곡가 크리스토퍼 애쉬가 2018년 처음 선보인 작품이라고 한다. 난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작품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에 볼 것 들을 것 읽을 것들은 너무 많다. 국내 초연이고 2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상연한다. 거의 매일 매진이지만 그래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보시기 바란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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